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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09화

윤회와 행복

by 조융한삶





사람들은 행복을 오해한다.


떡볶이를 먹을 때 느끼는 맵고 짬,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기며 느끼는 시원함, 롤러코스터가 급강하할 때 심장이 쿵쾅거리는 짜릿함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감각적 쾌락'이다.


감각적 쾌락은 언제나 그림자를 데리고 다닌다. 들뜸 뒤에는 우울이, 사랑 뒤에는 미움이, 쾌적함 뒤에는 불쾌가 기다리고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시소의 양 끝처럼 서로를 전제하며 끝없이 반복된다. 우리는 이 반복 속에서 헤맨다.


부처는 이를 '윤회'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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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우리는 어떤가.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개수에 일희일비하고, 주식 차트의 등락에 따라 기분이 요동친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샀을 때의 설렘은 며칠 지나지 않아 일상이 되고, 곧 더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으로 바뀐다. 우리는 안개 속을 헤매며 실체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 애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이란 고정된 실체란 없음을 의미한다. 같은 고양이를 보고도 누군가는 귀엽다 하고 누군가는 무섭다 한다. 절대적 아름다움도, 절대적 추함도 없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무상'(無常) 또한 마찬가지다. 강철로 지은 건물도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변하고, 불변할 것 같던 우정도 스러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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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는 집착한다.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다른 것이 같기를 원한다. 이 저항이 고통을 낳는다. 나태주의 시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지만, 그 자세히 봄과 오래 봄이 집착이 될 때 사랑은 고통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일까. 나는 점점 이런 생각에 기운다.


행복은 지극한 희열이 아니라 무덤덤함에 가깝다. 파도의 표면이 아니라 깊은 바다 밑바닥의 고요함 같은 깊은 평온, 그것이 진짜 행복의 모습이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어떻게 연결될지 모른다. 승진이 독이 될 수도 있고, 좌절이 약이 될 수도 있다. 이를 깨달으면 외부의 자극에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된다.


집착할 이유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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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행복은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평온한 마음의 상태, 고통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자유로운 날갯짓처럼,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가벼움.


물론 이것이 체념이나 무기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더 깊은 사랑이 가능해진다. 집착하지 않기에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고, 소유하려 하지 않기에 더 순수하게 관계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종종 맵고 짜고 단맛에 현혹되고, 좋아요 개수에 마음이 흔들린다. 완전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안다. 진짜 행복은 그런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행복은 이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격렬히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지금 여기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이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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