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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28화

도파민과 영혼 사이

행복의 기원

by 조융한삶



새벽 다섯 시, 잠깐 눈을 떴을 때 시작되는 의례. 의식이 들자마자 휴대폰을 집어드는 손가락의 자동반사. 메시지, SNS, 뉴스 헤드라인이 몇 초만에 망막을 스쳐간다. 뇌 속 보상회로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찰나, 곧이어 찾아오는 공허함. 단맛이 강한 사탕이 혀끝에서 녹아내린 후의 그 씁쓸한 허전함.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는 신경화학적 착각이자 오해다. 도파민은 행복을 주지 않는다. 단지 감각적 쾌락을 약속할 뿐이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다음 약속을 갈망한다. 파도가 해안에 닿는 순간 이미 포말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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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제임스 쌍둥이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생후 3주 만에 헤어져 30년을 모르고 살았던 두 사람. 똑같은 이름의 여자와 결혼하고, 똑같은 이름의 아들을 낳고, 똑같은 브랜드의 맥주를 마시며, 똑같은 해변에서 휴가를 보낸다. 심지어 그들의 행복 지수까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일치했다.


묘한 이중감정이 들었다. 내 삶이 이미 어딘가에 각본으로 존재한다는 섬뜩함과, 그렇다면 내 불행도 온전히 내 책임은 아니라는 안도감. 자유의지를 갈망하면서도 숙명에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선택의 무게를 지면서도 그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이런 결정론적 절망 앞에 시지프스를 떠올린다. 그는 신들의 형벌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 반복을 자신의 리듬으로 만들어낸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같은 바위, 같은 산이지만 매번 다른 자신이 그 일을 수행한다.


신경과학이 말하는 가소성도 그러하다. 뇌는 경험에 따라 물리적으로 재편된다. 시냅스가 강화되거나 약화되고, 새로운 신경회로가 형성된다. 유전자는 악보를 제공하지만, 그 악보를 어떻게 연주할지는 여전히 연주자의 몫이다. 심지어 즉흥연주도 가능하다. 결정론과 자유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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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보르헤스는 말한다. 행복은 회상될 때만 행복하다고. 행복이 과거에만 존재한다는 게 아니라, 현재는 너무 가까워서 그 윤곽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모네의 수련을 코앞에서 보면 붓터치만 보이듯이. 행복은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완료형의 문법을 따른다. 우리는 행복을 살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할 때 비로소 그것이 행복이었음을 안다.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아직 모를 뿐. 그럼 우리는 영원히 행복을 놓치고 사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그게 바로 인간 조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런 성찰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러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이 땅에 착륙하는 방식을 보며 우려가 든다. 행복의 추구가 현실 회피의 알리바이가 되는 순간들. 추모 공간 앞에서 맛있는 커피를 논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쁨. 하지만 성급한 도덕적 우월감도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소확행은 작은 것과 큰 것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에서 나온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돌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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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없는 것만 보였는데, 나이 들고 보니 가진 것들이 더 많이 보인다. 어쩌면 발전없는 체념처럼 들리지만, 사실 전략적 지혜에 가깝다.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면 결핍이 증폭되고, 풍요로움에 시선을 두면 감사가 확산된다. 의식이 현실을 구성하는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처럼.


그런데 현대 소비자본주의는 정교하게 설계된 불만족 제조 기계다. 지하철 광고판, 유튜브 알고리즘, 인스타그램 피드까지. 모든 것이 당신은 아직 부족하다고, 더 소유해야 한다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속삭인다. 만족한 소비자는 소비를 멈추기 때문이다. 우리 뇌가 진화한 수렵채집 환경과 정반대로 설계된 이 시스템 속에서 도파민 회로는 오작동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행복은 더욱 어렵지만 동시에 더욱 절실하다. 달콤함만이 아니라 쓰라림까지, 성취만이 아니라 상실까지, 만남만이 아니라 이별까지 껴안는 것. 니체의 운명애처럼 삶 전체를 긍정하는 것. 고통을 배제하려 하지 않고 고통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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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손바닥 크기의 스크린으로 지구 반대편과 실시간 소통하지만, 정작 자기 내면의 우주와는 연결되지 못한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한다. 여기에 나는 깊이를 추가하고 싶다. 표면의 기쁨이 아니라 심층의 평온. 일시적 쾌락이 아니라 지속적 만족. 재즈에서 불협화음이 전체 하모니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처럼, 슬픔과 고통이 없는 행복은 단조롭고 얕다.


봄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는 손끝의 미세한 감각, 낮잠을 자는 고양이의 숨소리, 모니터에서 발산되는 연한 열기,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까지. 이 모든 것이 지금 여기, 이 현재를 구성한다. 모든 것은 변하고 흘러가지만, 바로 그 무상함이 이 순간을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행복을 소유하려는 현대인의 착각이 여기에 있다. 행복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양태다. 붙잡을 수 없기에 아름답고, 영원하지 않기에 절실하다. 도파민의 춤이 끝난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이 행위 자체가,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이 과정 자체가 우리가 찾던 답일 수도 있다. 때로는 답을 찾는 것보다 좋은 질문을 지니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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