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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Jan 15. 2017

라라랜드, 꿈꾸는 바보들을 위한 노래

모든 청춘에 바치는 찬가

(아무래도 스포가 포함된 것 같습니다만, 개봉한 지 한 달도 넘었는데 그냥 보십시다. 찡긋.)




실은 라라랜드의 개봉 전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는데 참석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도 있긴 했지만 소위 ‘확’ 땡기지는 않았다고나 할까. 뮤지컬 영화를 표방하다 무참히 스러져간 수많은 망작들이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스쳐간 탓도 매우 크겠다. 내 극장 인생 최초로 내적 박수를 폭발하게 만들었던 위플래시 감독 작품인걸 알았을 때, 혹은 최소한 라이언 고슬링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했다는 걸 알았을 때라도, 그것도 아니면 ‘만남-사랑-이별’=‘청춘’이라는 뻔한 공식이 아닌 ‘< 청춘’ 임을 표현한 영화라는 걸 알았을 때라도 참석한다고 말할 걸, 후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짜로 볼 영화는 아니니까 차라리 잘됐다 싶긴 하다.







꿈꾸는 바보들을 위한 노래

요즘 같은 세상에선 꿈을 꾸고, 꿈만 꾸고, 꿈꾸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고 흔히 ‘바보’라고들 부른다. 좀 늘려서 말해볼까? ‘현실감각이 없다’,’ 배가 불렀다’,‘아직 어른이 안됐다’ 등등등.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현실감각이란 밥만 벌어먹고 살면 뭘 해도 상관없다는 얘긴지, 그렇다면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조건만 주어지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에 동의한다는 건지? 그게 맞다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장 높은 가치, 즉 존엄성을 ‘현실감각’이라는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다소 천박하기까지 한 표현보다 밑에 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얘긴지, 아 또 그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의미 로들 하는 말인지 따져 묻는 것은, 음, 다음에 하도록 하자… (흥분하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일부러 영화를 보고 한참 후에 글을 쓰는데도, 결국 또 흥분해 버렸고 이런 나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아직 어른이 안 된’ 인간인가 보다.)



뭐 아무튼. 그래서 남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냥 ‘바보’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의 꿈을, 꿈을 이루기 위한 자신만의 노력을, 그 꿈에 대한 포부를 말하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왔다. 심지어 어느 시점부터는 (아마도 ‘헬조선’이라는 너무 공감되기에 그만큼 끔찍한 단어가 창궐하기 시작한 그 어느 순간) 도덕적으로 나쁜 짓 보다 ‘꿈꾸는 것’이 더 금지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회사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동료의 성과를 내 것인 양 잠시 차용하는 것은 ‘깜찍한 처세법’이라고 미화해주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소년’ 같은 사람에게는 ‘집이 잘 사나 보다’며 손가락질하는 세상.



혹시 나만 모르게 ‘꿈꾸기 금지 법안’ 같은 게 발의되어 브이 포 벤데타의 세상처럼 알아서 검열하며 사는 거 아닐까, 망상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던 나의 앞에 라라랜드가 도착했고, 이 ‘LAND’엔 ‘바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나온다. 와우.   



바보 1, ‘미아’는 배우를 꿈꾸는 배우 지망생으로,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장기 휴학생이다. 바보 2, ‘세바스찬’은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로, 정통 재즈바를 운영하는 게 꿈이지만 현실은 막 소방차. 막 정원관. (…) 영화는 이 두 명의 바보들과 함께,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찬란한 것인지, 시리지만 따뜻하고, 아프지만 행복한 것인지를 풀어낸다.



얼마 전 2016년 관람 영화 총결산을 해봤는데, ‘꿈’에 대해 풀어낸 작품은 내 기준 단 2 작품. 그나마 ‘성인의 꿈’으로 기준을 올리면 0이다. 제로. 실로 엄청난 발견. ‘미성년일 때의 방황은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무릇 ‘어른’이라 함은 자고로 '어른’스럽게! 방황은 무슨, ‘꿈’ 꾸는 소리 집어치고 네 마음에 추억으로 묻어둔 채 현실을 살거라.'라는 사회적 표어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완벽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인생의 대부분의 답은 영화 속에 있다는 내 믿음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라라랜드가 개봉한 후 스코어는 바뀌었다. 0에서 1로.  





아프니까 청춘이다 바이러스

어쩌다 보니 재즈 피아노를 전공한 친구와 함께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감독의 전작인 위플래시도 이 친구와 함께 했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우리는 평소에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나누며 낄낄대기 좋아하는 바보들인데, 라라랜드를 본 날은 영화를 보고 난 후 한 잔 하러 간 자리에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라이언 고슬링 보는데, 되게 공감되더라. 꿈과 현실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래서, 물었다.


아, 너도 싫은 곡 연주할 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제일 사랑하는 건 정통 재즈야? 그거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해?


당연하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약간 놀랐다. 정말 인연이 오래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친구인데도 저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었다.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저 ‘꿈꾸기 금지 법안’과 ‘헬조선’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빚어낸 ‘바보들 입막음 바이러스’에 우리 모두 감염되어 온 것 같다. 효과는 굉장했다. ‘그냥 다들 그렇게 사니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사람 없으니까, 그러니 나도 특별할 게 없으니까, 말해봤자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라는 생각을 모두가 하게 만들었으니. 이 정도면 거의 ‘공기 중 무차별 살포’ 수준임.




결국,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현실에만 집중했지 꿈이나 이상에 대해서는 얘기해 본 적이 없었던 거다. 바꿔 생각해보니 나도 친구에게 내 꿈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별로 얘기해준 적이 없더라. 어릴 때는 시험성적, 그 후엔 대학 합격 소식, 그리고는 입사 소식, 승진 소식… 이런 ‘객관적으로 축하받을 만한 소식’들만 전했던 것 같다.




‘내가 이번에 승진을 했는데, 사실 내 꿈은 글을 쓰는 거야.’라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세상, 사회, 우리. 한 켠에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내몰면서, 그 와중에 꿈이라도 좀 꾸면서 아프겠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호통치는 세상, 사회, 우리.  


아픈 건 환자고, 병원에 데려가야 맞는 거고. 청춘이든 중년이든 꿈을 꾸든 X대로 살든 말든 최소한 입막음은 하지 말기를. 진짜 솔직히 말해서 아프지도 않고, 미래가 불안하지도 않으며, 흔들려보지도 않고, 꿈꿔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지.








왜 주인공을 ‘미아’라고 생각했을까?

원탑을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라면 보통 남주/여주라고 표현하기에, 따로 ‘주인공’을 생각해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라랜드를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미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무의식적으로. 아예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랬기에 영화 전체를 뒤흔드는 폭풍 같은 마지막 5분 시퀀스도 당연히 미아의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채 내 머릿속 라라랜드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면 오늘날 이 글도 없었겠지.




첫 번째 관람을 마치고 큐레이터 분의 영화 해설을 듣는데 생각지도 못한 멘트가 귀를 때리고 지나갔다. “... 마지막으로 앵글이 360도 도는 장면은, 누구의 상상일지 모르겠지만 해피엔딩으로 재상상하는 지점...” ‘엥? 누구의 상상일지 모르겠다니, 당연히 미아...’까지 생각이 미쳤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뭐가 당연한가. 당연히 누구의 상상일지, 혹은 둘이 같이 하는 상상인지 모르는 건데.



첫 에피소드의 시작이 미아이고, 미아와 관련된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어 나가다 보니, 당연히 모든 장면을 미아의 시점으로 생각하고 본 것이다. 결정적으로 내가 미아와 같은 성별이어서 엄청난 감정이입을 했었겠지. 반성한다. 엄청 편파적으로 영화를 관람했다는 거. 비록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그 영화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되는 건 맞지만 연출자가 의도한 영화 속의 모든 ‘세계’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으로 관람하는 게 나 자신의 인생공부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사운드가 빵빵한 상영관에서 재관람을 하게 되었고, 두 가지 소박한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첫째, 엔딩크레딧에 흐르는 첫 번째 이름은 ‘라이언 고슬링’이다. (첫 관람 때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우느라 못 봤음) 둘째,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건반을 가장 멋있게 연주하는 사람은 분명 유희열 한 명이었는데, 두 명이 되었다는 것.







마지막 5분을 위한 영화

누가 그러더라. 라라랜드는 ‘본격 대국민 전 애인 소환 프로젝트’라고. 그렇게도 구애인들을 생각나게 한다고. 그 이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엄청난 반전이었던 마지막 시퀀스 때문일 것이다. 실은 제발 해피엔딩으로 (그렇다고 이 영화의 엔딩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제는 안다.) 끝나기를 손 모아 바라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바라던 엔딩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둘을 보며 정말 속상했었다. 그들의 상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허탈해하던 내 눈앞에 ‘완벽한’ 둘이 나타났다. 주인공들이 두 번째 만났던 장소인 레스토랑에서, 미아가 셉을 알아봐 주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둘은 키스를 했다. 아, 아직도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자주 오지 않는 이런 순간 때문에 어쩌면 나는 계속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우리 모두가 바라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꿈을 내 눈앞에 풀어내 주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관객 모두 미아와 셉이었고, 자신들의 이전의 셉과 미아를 소환하고 있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만약에 그때 내가 잘못했으니 이러지 말자고 말했다면, 만약에 그가 그때 내게 한 번만 와주었다면, 만약에 한 번만 뒤돌아 봤었다면... 그 강렬한 5분 동안 상영관에는 무수히 많은 ‘만약에’가 모여서 둥둥 떠다니며 저마다의 ‘해피엔딩’을 만들어냈다. ‘만약’의 영역이지만 ‘완벽한’ 순간이었고, ‘완벽한’ 사랑이지만 있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너무 서운했다.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나의 이전 사랑의 실패를 답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냥 영화에서라도 완벽한 사랑이나 해피엔딩 같은 거 좀 보여주면 안 되나, 야속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날이 지날수록 자꾸 마음에 무언가가 남았다. 기분 나쁘거나 찝찝한 느낌이 아니고, 아련하게 떠올리고 미소 짓게 되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리고 이제는 섭섭하지 않다. ‘만남-사랑-이별’=‘청춘’이라는 내 안의 어린 시선을 떨쳐내고, 그 모든 걸 포함하는 게 청춘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5분을 사랑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청춘의 서사’라고 표현하고 싶다. 작은 범주의 이성애적 표현인 ‘사랑’이라는 말로 이 완벽한 시퀀스를 축소시키고 싶지가 않다. 아, 또 보고 싶다.








라라랜드는 너무도 명확하게 ‘비교적 누구나 관람하기 쉬운 상업영화’다. 스타 감독, 스타 배우, 대자본, 할리우드, 공격적 마케팅, 압도적인 상영관 수... 영화를 떠올렸을 때 상상 가능한 모든 구성요소가 명백한 상업영화임을 보여주고, 반박의 여지도 없다. 그럼, 소위 말해 쉬워야 하는데. 그럼, 대부분의 연령층에서 이해 가능한 오락영화라는 건데... 미치겠다. 나는 최근 관람한 그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가 너무 어렵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시골길만 30분 동안 나오던 독립영화보다 이 영화가 더 어렵다. 상영시간 내내 언어장애가 있는 주인공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풍경만 주구장창 나왔던 어떤 영화보다 너무 어렵다.




라라랜드의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퀀스까지 자로 잰 듯한 완벽한 연출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가 얼마나 큰 영감을 주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건 쉽다. 아마도 모두가 공감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찬양했을 것이기게 시간 절약을 위해서도 나까지 똑같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 이 영화를 보며 나만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고 싶은데, 태산처럼 많은 것 같다가도 머릿속이 하얘진다. 하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오르다가도 한 점도 남김없이 흩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긴 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뭐가 맞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서.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한번 더 얘기해 보고 싶다. 라라랜드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덧붙임)

썸머보고도 X년이라더니, 미아에게도 X년이라고들 한다는데, 이 얘기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감도 안 잡혀서 다음 기회로 살포시 넘기도록 합니다.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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