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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Sep 05. 2016

최악의 하루, 미드나잇 인 서울

윤선배와 은희의 옥타브 사이

얼마 전 '미드나잇 인 파리' 재상영이 있어서 별생각 없이 '그냥' 다시 보러 홍대의 상영관을 찾았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거의 잊고 있었는데, 극장이 암전 되고 스크린에 첫 화면이 시작되는 순간 다시 그 사랑을 깨달아버렸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재즈와 함께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그 날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국내에는 이런 영화가 없는 걸까? 서울에 바치는 헌정 음악 같은 영화. 서울도 파리 못지않게 멋진데...라고.

그리고, 드디어 그런 영화가 나왔다.








미드나잇 인 남산, 그리고 재즈
나는 원래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최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관에 간다. 그냥 다른 정보 없이 내 눈으로 영상과 배우의 연기와 분위기를 오롯이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타인의 평가로 인해 좋은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기회를 놓친 뼈아픈 경험이 많음..흡..) 최악의 하루도 내겐 그런 영화였고 그래서 첫 화면에 서촌 구석구석의 풍경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올 때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너무 행복해졌더랬다. 뭐... 뭐야, 미드나잇 인 파리자나...... 너무 아름답자나.....



영화는 하루 동안 은희의 발길을 따라 서울의 이 곳 저곳을, 특히 남산의 초가을을 아주 가깝게 또는 멀리서 조망한다. 비록 배경은 가을이지만 봄을 상징하는 듯한 푸릇푸릇한 초록이 화면 곳곳에 부서져 내리는데, 영화의 중반부쯤에는 급기야 나도 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서 저기 있는 초록을 주인공들과 느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뭐 비록 주인공 은희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지만..왠지 미안..)





서울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서촌이, 남산이 저렇게 푸르던가? 정말 날씨 좋은 날 찍으셨나 보다. 너무 좋다. 이런 생각만 영화 상영 시간 내내 했던 것 같다. 이 정도로 감성적인 영상미가 너울대는 영화를 너무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반짝이는 초록색 영화는 아예 처음이었기에. 게다가 그 푸르름 위에 자연스레 흐르는 재즈 선율까지. 내심 한국 영화는 재즈랑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왔던 내 편협하고 빈약한 선입견, 반성한다.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려요 재즈랑, 서울.





몇 년 전의 데자뷰
아마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악의 하루를 보면서 '으하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놀라셨죠? 뻥 같죠? 근데 그렇게 크게 웃은 사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ㅎㄷㄷ..




주인공 은희의 현 남친과 전에 잠시(라기엔 꽤 오래인 것 같은) 만났던 구 남친이 예기치 않게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 정말. 그 순간 내가 은희가 되어서 우주로 날아가버리고 싶었다.

은희가 그렇게까지 당황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둘을 좀 겹쳐서 만났기 때문. 깔끔한 관계가 아니다 보니 들키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까. 심지어 구 남친은 현 남친의 존재조차 몰랐다.

두 번째는, 내가 생각하는 이유인데, 각각의 상대에게 보여지고 싶은 '나'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남자에게 은희는 본인들이 바라는 각각의 은희이다. 그런데 그 각자의 은희가 부딪히는 지점이 생겨버리니까 주인공은 멘붕이 왔던 것. 상대가 바라는 '나'를 기꺼이 보여주고 싶었던 은희의 이런 마음 또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웃지 못할 씬을 보면서 아주 예전에 내게 있었던 일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당시 썸남 1,2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남친이 되었고 썸남 1과는 자연스레 멀어졌었다. 그러다가 좀 오랜만에 단과대 4층에서 썸 1과 우연히 재회를 하였는데 1층으로 같이 내려가야 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거다. 그런데 1층에서는 남친이 기다리고 있었고, 난 그 둘을 만나게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혼자 온갖 쑈를 다 하면서 그 상황을 피하려고 별 수를 다 썼었다. 중앙계단 말고 복도 끝 계단으로 일단 내려간다음, 썸 1이 잘 내려가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러면서 남친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느라 얼굴 반을 목도리로 감고.... 뭐하는 짓인지. (훗날 그때 나를 멀리서 본 친구들이 별 미친...이라고 했음)


그 날 집에 가면서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한 답을 구해봤는데, 그냥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머리 속의 나로 남고 싶었던 거 같다. 남친이 생긴 나,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는 남자를 인사시키는 내가 아니라.


딱히 그 썸남 1과 다시 잘 될 여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졸업했다.지금 뭐하니...자니...?) 다른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각자 다른 나를 알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기가 정말 싫더라. 극 중 은희도 이런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각기 다른 세계 속의 은희로 남고 싶었던 마음.








윤선배의 아름다운 음울함과 은희의 높은 옥타브 사이
최악의 하루를 보리라 마음먹은 이유 중 팔 할은 바로 배우 한예리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아름다운 음울함을 지닌 윤선배 역할을 소화하는 한예리를 12화 동안이나 봐왔더니 좀 다른 모습의 밝은 윤선배를 보고 싶어 졌었다.


그런데 스크린으로 마주한 은희에겐 며칠 전까지 만 해도 다크미를 뽐내던 나의 윤선배는 흔적도 없었다. 분명히 얼굴은 같은 사람이 맞는데, 단 한 씬에서도 윤진명의 그늘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배우들은 도대체 몇 개의 삶을 사는 걸까.






가장 인상 깊었던 디테일은 한예리의 '목소리'이다. 윤선배는 극 중 캐릭터 상,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고학생이라서 감정 기복도 심하지 않고 이에 따라 중저음의 목소리를 낸다. 거의 모든 대사의 톤이 다 낮아서 저 배우는 원래 발성을 저렇게 하나보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윤선배의 얼굴을 한 또 다른 배우가 스크린에서는 하이톤으로 은희의 말을 하고 있더라. 여자치고도 좀 더 높은 톤으로 대사를 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캐릭터와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이 돼야만 하는 게 배우의 존재가치이자 숙명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진짜 한예리일까. 혹은 어떤 모습이 더 진짜 배우 개인의 모습에 가까울까 이런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별 의미가 없는 일이라 이내 거두었다. 내가 무슨 결론을 내리든, 어차피 또 다른 한예리가 되어 나타날 테니까.




최악의 하루일지, 최고의 순간일지는...
힘겨운 하루를 보낸 은희의 앞에 영화 시작부에 우연한 인연을 맺었던 료헤이가 다시 한번 나타난다. 그리고 그 둘은 대낮같이 밝은 달빛을 받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료헤이에게도 또 다른 제3의 은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겠지만 난 그 모습이 가장 은희에 가까운 모습인 듯 보였다. 왜냐면 다른 두 남자와 있을 때보다 은희가 제일 편해 보였고 가장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리라.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모든 일들을 마무리하고 파리에 홀로 남게 된 주인공 앞에 우연히 인연을 맺었던 여자가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는 왠지 자꾸 마음이 기우는 그녀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게 된다. 웃으면서.




아, 완벽한 미드나잇 인 서울이다.









은희가 료헤이와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나갈지 혹은 그 날이 끝이었을지 그건 중요치 않다. (솔직히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도 같다.) 단지 내가 바라는 건 은희가 그 날을 최악의 하루가 아닌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했으면 하는 거다.

남산의 달빛에 취해,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보여주자, 타국에서 온 소설가는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의 엔딩을 만들어주었으니까. 진짜 배우가 되고 싶은 은희에겐 그게 바로 최고의 순간이지 않을까.












(+) 아 그리고 이희준씨..연기 너무 잘해욬ㅋㅋㅋㅋ아 미쳐버림ㅋㅋㅋㅋㅋ 특별출연으로 인생연기 경신하신 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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