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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May 01. 2017

언노운 걸, 찰나의 외면이 만든 무명

And life goes on.



당신은 동네 클리닉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다.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이 아주 힘든 날이었고,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는 애는 도움은커녕 어리바리 날 더 힘들게 한다. 그 인턴에게 한 마디 하고 있는데 병원 벨이 울린다. 마감한 지 한 시간이 넘은 시간,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문을 열어줬겠지만 지금, 오늘의 당신이라면 과연 문을 열어줄 것인가?



나라면 주인공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문을 열어주려는 인턴에게 본때도 보여줄  겸. 그리고 엄연히 마감시간은 훌쩍 지났으니까, 문제 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아주 쉽게 결론지을 것이다. 누가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관객을(=나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어떤 영화에서 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살릴 것인지' 혹은 '오늘 처음 본 어린아이를 살릴 것인가' 하는 작위적이고 극단적인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시각 벨을 눌렀던 이름 모를 소녀가,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되어 버리고 말았다면. 그 순간부터 나의 윤리의식은 변할까?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아니면 나는 여전히 잘못한 게 없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 










개과천선도엄청난 비밀도 없는 서사이기에 더 무섭다.

위에 잠시 언급한 스토리라인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적어도 주인공인 ‘나’는 원래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올 법한, 돈에 혹은 명예욕에 미친 의사여야 할 것이다. 마감시간을 딱 1분 넘긴 시각 애처로운 처지의 환자가 병원 문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하지만, ‘나’는 모 병원장과의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반드시 지금 나가야만 하기에 평소와 같이 가볍게 ‘내일 오세요’라는 말만 남긴 채 병원을 나선다. 다음날 그 환자는 인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나’에게도 경찰이 찾아오지만 ‘나’는 사실상 잘못한 게 없으므로 아는 한도 내에서 진술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하지만 이후 ‘나’에게 비난여론이 거세게 일자 진작에 논의 중이던 부원장 자리도 물 건너 가버리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즉, 그 날 내가 문을 열어주는 것과 별개로 그 환자는 해를 입을 처지에 있었다는 걸 밝혀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고 이렇게 철저히 ‘나’의 누명을 벗기 위해 사건을 수사하던 중 주인공은 엄청난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데... 투 비 컨티뉴.



자, 확실히 아무런 비밀이 없는 스토리보다야 흥미롭긴 하다. 대체 저 엄청난 비밀은 무엇일지 막 궁금해지기도 하고. 사실 지금 막 쓴 거라 나도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잘 쓰면 되게 재밌을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모두의 눈은 ‘흥미로운 사건’으로 향해 버린다. ‘주인공’이나 ‘환자’에게 향하는 시선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편적이라 자부하는 ‘우리 모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기 때문이고, 따라서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할 수 없게 되며 그저 ‘먼 곳의 이야기’,‘꾸며낸 이야기’라는 선에서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윤리’가 끼어들 틈은 영원히 없어진다. 



짐작하겠지만 언노운 걸은 이런 얘기가 아니다. 언노운 걸의 주인공 ‘제니’는 어디 한 군데 감정선이 고장 나 있는 소시오패스도 아니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눈 딱 감고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같은 직업인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름 모를 누군가의 죽음은 그냥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그 ‘언노운 걸’의 이름이나마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문을 열어주지 않은 행위에 대한 ‘나’의 의도에 있다. 평소였더라면 분명히 문을 열어줬을 테지만, 인턴을 의식하느라 굳이 ‘고집’을 부려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바로 그날, 평범한 364일이 아닌 조금 특별했던 단 하루의 내 선택이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이기에 제니는 이름 모를 소녀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거다. 아마도, 원래 어떠한 경우에도 마감시간은 엄수하는 성격이었다면 이 사건은 그녀에게 큰 타격이 아니었을 거다. 왜냐면 나의 365일은 고정되어 있고 어떠한 변수도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다음날 죽은 채로 발견된 소녀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날의 ‘평소와 다른 태도’는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에 오롯이 남아버렸고 결국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웠다. 더욱이 그 ‘평소와 다른 태도’는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자신의 폭력이자 갑질이었기에, 그녀의 험난한 여정은 이미 너무나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는 과연 악당이 아닌가.  

영화는, 제니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의 ‘찰나의 외면’으로 채워진다. 제니도, 또 다른 사람들도 엄연히 말하자면 범법을 저지른 건 아니다. 그저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악당은 아닌 것인가? 마약을 팔고, 폭력조직을 위해 봉사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꼬드겨서 작업대출을 해주는 사기꾼들만이 악당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영화 ‘언노운 걸’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저들과 달라. 나는 정상인이지. 적어도 난 범법자는 아니니까. 내가 사기를 쳤어, 사람을 죽였어, 뭘 했어? 저런 나쁜 범죄자들.’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의 의식 속에 쑥 하고 칼을 꽂아 넣는 영화다. 사실상 우리 주변에, 영화에 흔히 나오는 그런 ‘진짜 악당’은 잘 없다. 생각해 보시라. 혹시 주변에 하루 걸러 한 번씩 사람을 담그고 (?)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그저 딱 한 움큼씩만 무심하고, 한 모금씩만 모른 척하며, 찰나의 순간 ‘괜찮겠지’라며 딱 1초간 눈을 감아버리는 그 사소한 행위들이 모여 진정한 일상의 지옥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주인공 제니는 그 지옥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살지 말고, 잠깐 이리 좀 나와 보라고 안내하는 일종의 길잡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후반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당신은 다 끝난 일이라고 하지만, 진짜 끝이 아니니까 우리가 괴로운 거라고. 그냥 묻을 수가 없으니까 힘든 거라고. 그 부분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마음에 묻자고 하는 사람도, 또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사람도 그들 모두에게 진짜 끝이 아니니까 괴로운 거구나, 단번에 이해가 되더라. 과연 나는 이런 지옥도 같은 삶에서 제니 같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든다. 작은 악마들이 알음알음 모여 살고 있으면서, ‘내가 그래도 쟤보단 나아’라고 생각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게 혹시 인생인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리고 '마지막'에 대하여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마지막회-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상징적 안타고니스트인 (이건 아직까지도 확신하기는 어렵긴 하다. 그가 주인공인지, 안타고니스트인지.) 한정호는 자식도 집을 나가고 와이프에게도 버림받은 상황에서 과연 여느 드라마처럼 ‘개과천선’할 것인가 혹은 또 다른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했었다. 물론 30회 차 가까이 끌고 온 그 드라마의 색깔을 생각하면 갑작스레 착해진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하니까, 도대체 어떻게 ‘끝날 것인가’가 미치게 궁금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결론은 ‘끝나지 않는다’였다. 그 으스스한 한정호의 저택 안에서, 주변인들의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은(것처럼 보인) 채 안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클로즈업도 아니고 바스트샷도 아니고, 카메라가 그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현관에서 카메라는 고정된 채 한정호라는 인간의 평생 중에 일부를 잠시 촬영한다는 듯이,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렇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게 마치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인생 일부를 잠시 훔쳐보고 나오는 것일 뿐이면서 항상 결론을 요구하고 되도록이면 ‘해필리 에버 애프터’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언노운 걸’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2년 전 느꼈던 그 충격을 다시 한번 받았다. 분명히 ‘영화적으로’ 멋지게 끝낼 수 있는 지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를 주인공 제니와 환자의 뒷모습으로 끝낸다. 주인공의 커지는 동공 클로즈업이나 슬픈 음악, 안아주고 달래주고 함께 울어주는, 누가 봐도 ‘클라이맥스’인 그런 장면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노인환자를 조심스레 부축해 주면서 끝이 나버리는 영화. 배경음악도 없고 인위적인 장면 뒤틀림도 없는 영화. 영화 속 사건은 주인공의 길고 긴 인생 중 단 몇 컷이었을 뿐으로, 갑자기 제니가 그로 인해 바뀔 일은 없을 거라는 뜻. 그들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고 단지 잠시나마 돌이켜 생각해볼거리를 던져준 정도의 사건이라는 것. 십여 년 전 방영된 ‘사랑과 야망’의 마지막 장면처럼, 일상은 계속될 뿐 우리는 그 지난한 일직선 위에서 아주 조금씩, 조금씩 생각해볼 만한 여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것.  








영화의 제목 ‘언노운 걸’은, 다르덴 형제의 반어법적인 표현도 가미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상 언노운 걸이라기보다 아무리 말해주고 알려줘도 알고 싶지 않고 듣고 싶은 않은 거리의 소녀였던 것 아닌가. 



‘윤리’가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과목이 아니었으므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었는데, 컴컴한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그 교과서의 묵은 때를 털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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