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쌓아 올린 자신의 한계
내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처음 본 건 아마 ‘살인의 추억’ 일 터다. 무섭거나 잔인한걸 잘 못 보는 주제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영화를 보고자 결심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간고사를 마친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아주 환한 대낮에 무려 대한극장에서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음, 되게 재밌었다. 분명히 눈 감고 못 본 장면도 꽤 있었지만, ‘아 모야 이거 되게 재밌네.’ 이러면서 봤었다.
요새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 하나가 바로 ‘영화를 영화로 재밌게 보기’인데, 그때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맨날 영화관으로 놀러 가던 시절이라 저게 가능했던 것 같다. 뭐 어쨌든, 스릴러라고는 평생 봤다고 할 만한 게 ‘토요 미스터리’ 정도였던 조꼬딩에게 그런 장르가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 바로 봉준호 감독이다.
그때 그 조꼬딩은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며 쑥쑥 자라 어느새 꼰대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는 영화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버린 ‘어른’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는 인생의 전부였던 영화들과 봉준호보다 다른 중요한 게 많아져서, 가끔 그들을 잊고 살기도 한다. 그런데 봉준호는 아직 꼰대도, 어른도 되지 않은 채 살고 있더라.
그의 최신작 ‘옥자’를 삼세번 보고 나서야 겨우, 이 글을 쓴다.
간지 폭발 디렉터봉
사실 나는 좀 이중적인 사람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히 이성의 영역에서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말도 안 되는 이상향을 꿈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 그렇기 때문에, ‘29살인데 막 대기업 상무야. 근데 심지어 잘생겼는데 날 좋아해.’ 뭐 이런 드라마를 보는 거다. 그 말도 안 되는 걸 왜 보냐고들 묻는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항상 궁금하다. 님들, 그게 말도 안 되니까 보는 거랍니다…
어쨌든 그런 면에서 감독 봉준호는 나의 이중성을 정확히 충족시켜주는 원 앤 온리 연출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투자자에게 피 같은 돈을 투자받았으면 그 돈을 보전시켜줄 방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감독의 당연한 의무지!’라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준 사람에게 야광봉을 흔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일은 실현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왜냐면 진짜 지맘대로 하면 짤리기 때문임) 동경하는 건데 말이다, 봉준호는 그걸 그냥 실현시켜 버리니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나는 단 한 번도 대규모 상업영화감독의 입에서 대놓고 ‘내가 바로 관객이고 따라서 내가 보고 싶은걸 만든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다. 봉준호 이외에는. 다른 감독들은 절대 (최소한 입 밖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그는 저렇게 툭툭 내뱉는 인물이다. 마치 라잌 피터팬처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저게 허세가 아니라는 거다. 아니, 그의 결과물을 보고 나면 허세일 수가 없다는 거다. 그가 감독으로서 멋있는 지점은 저게 진짜로 가능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즉, 더 이상 남의 의견(=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창작자인 ‘내’가 보고 싶은 걸 만드는 게 가능한 사람이라는 거. 솔직히 ‘옥자’를 본 누구라도, ‘와, 진짜 봉감독 이번에 하고 싶은 거 다했네ㅋㅋ’라고 생각하게 할 만큼 스크린을 마음대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감독이라는 거. 그게 진짜 간지 터진다.
글을 쓸 때 (비록 내 맘대로 끄적거리는 글이나마 ‘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의 모토 또한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게 너무나 쉬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나의 ‘글’에는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이 1도 없고, 내게 글을 쓰라고 ‘돈’을 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또르르..) 그렇기에 대략 절반 정도만 맘에 든 영화를 보고 나와서 ‘리뷰 한 번 써볼까’ 싶다가도 저 모토를 떠올리고 생각을 접게 된다. 지금이라도 쓰고 싶은 글만 쓰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이렇게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러니, 막대한 제작비와 모든 스태프의 생계가 달려 있는(감독 자신 포함) 영화라는 일종의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다 비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찍는다’는 그의 마인드가 허세로 보이지 않는 것은, 실제로 이를 해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생각해보면 감독 봉준호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한계를 다시 쌓아 올린다는 것의 의미
내가 ‘옥자’를 봉준호의 다른 그 어떤 영화보다 높이 평가하고, 봉감독 경력에서 (어떤 의미가 될진 정확히 몰라도)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져있는 것 같다. 즉, ‘옥자’ 이전과 이후로 그의 작품세계가 나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인데, 그 기준점은 감독이 영화의 소재를 표현하는 방식과 맞닿아있다.
만약 ‘옥자’가 일반적인 극본을 바탕으로 한 평범한 감독의 영화였다면 숨겨진 메타포를 찾느라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대개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1) 진짜 공장식 축산환경의 문제점을 짚어주는 다큐멘터리거나, 2) 비유의 힘에 기댄 어려운 영화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시라. 당신이 감독이라면 공장식 축산 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이에 나아가 관객들의 인식 변화까지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 어떤 식으로 영화를 만들지를. 정답은 1번 아니면 2번뿐인 이 말도 안 되는 난제를 앞에 두고 봉준호는 우리 모두의 허를 찌르듯 다른 선택지를 택했다. 아니, 그냥 시험지를 찢어서 날렸다. 진짜로 ‘유전자 조작 슈퍼 돼지’와 ‘대량생산에 동물을 편입시킨 시스템’을 그대로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재밌는 영화로다가. 헐…
옥자를 보는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포인트는, 영화 전체적으로 비유라고는 1도 없이 ‘진짜’를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나는 지금 오락영화를 보고 있다’ 고 생각하게 만든 그의 기획력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름대로 생각해본 결과, 비밀은 그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그만의 ‘확신’이었던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맞다’는 확신. 확고한 신념 없이 대충 눙치고 지나가며 살고 싶은 사람들(=it’s me!)에게 가장 어려운 것. 그들은 절대 할 수 없는 것. 바로 정공법.
당연히 한 순간에 이런 경지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괴물’이나 ‘설국열차’ 같은 전작들을 통해 한 단계씩 자신만의 계단을 차분히 밟아왔다는 것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쉽게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감독 본체 못지않게 좋아하는 영화인 ‘괴물’의 경우, 괴물이라는 상상의 동물에 빗대어 국민이 위기상황에 몰렸을 때 정부가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몇 년 뒤 한국에서는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설국열차'를 마주한 우리 대부분은 '저 열차는 이 세계이자 이 나라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조금씩은 했을 거다. 다들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이지, 이 사회가 실은 보이지 않는 카스트제도 하에 있다는 거, 알고 있잖은가.
이런 과정을 거쳐 오랜만에 우리에게 내놓은 영화가 '진짜'를 과감하게 까발리는 '옥자'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봉준호 유니버스의 분명한 확장이고 이미 정상에 오른 자가 다시 '정상'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오른 과정 그 자체다.
이 땅의 창작자라면 보장된 안전한 바운더리에 안주하는 게 얼마나 편한지, 또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두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한계를 자기 손으로 다시 쌓아 올린다는 것 또한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고.
노골적이지만 사랑스러운, 미자.
노골적: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사랑스러운: (사람이나 그의 언행 또는 모습이) 사랑하고 싶도록 귀여운 데가 있다.
우리가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노골적'이라는 단어와 '사랑스럽다'는 형용사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어사전을 빌어 설명하자면, '숨김없이 드러내면서'도, '사랑하고 싶도록 귀여운 데가 있기'는 매우 어렵다는 뜻이겠다. 보통 노골적인 건 현실이고, 사랑스러운 건 이상이다. 노골적인 건 내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이며, 사랑스러운 건 항상 꿈꾸는 천국이다. 그렇기에 보통 노골적인 사랑스러움은 존재할 수가 없다. 어떻게 노골적으로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는데 사랑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영화 '옥자'는 면면이 노골적이면서도 사랑스럽다. 슈퍼돼지 옥자도 충분히 사랑스러운데, 미자는 또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가? 도대체 왜?
미자(안서현 분)는 사실상 이 영화에서 가장 '노골적'인 인물이다. 손녀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희봉'도, 옥자 사진을 못 찍게 막아놓고 정작 셀카봉을 들고 옥자와의 투샷을 노리는 '문도'도, ALF의 성공을 위해 신성한 번역을 모독한 '케이'도, 알고 보면 완벽하지는 않은 불완전한 리더인 '제이'조차도, 노골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하나씩 소거법으로 쳐내다 보면, 가장 노골적인 인물은 단 한 명, 미자만이 남는다.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미자가 숨김없이 드러내는 욕망은 단 하나이다.
'나의 옥자를 되찾고 말겠어.'
이렇게까지 하나의 목표만을 보며 달려오는 캐릭터도 정말 흔치 않은데, 그건 인물이 너무 평면적으로 보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 수업을 들어보면, 사실상 이런 인물은 존재하면 안 된다.) 그런데 오히려 이 아이의 단순해 보이는 한 가지 욕망에 우리는 결국 감화되고,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노골적임'이 '사랑스러운' 경지에 이르고야 만다.
이런 맥락에서(=영화의 주인공을 미자로 보는 시각) 본다면 마지막 미자의 선택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솔직히 말해서 결말에 대해 이견이나 논란 혹은 아쉬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이다. '진짜'만 나오는 이 영화의 결말이, 옥자의 모든 형제들까지 으쌰 으쌰 전부 탈출시키고 위아 더 월드~였다면, 정말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게 '진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선택이라는 미명 하에 또다시 안전한 바운더리에 숨을 것인가? 이 잔인한 물음에 봉감독은 진짜 어려운 마지막 선택을 했고, 내 기준으로 한 손에 꼽을만한 결말이 탄생했다.
'다른 돼지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일단 옥자만 구하면 되니까,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돈으로 사겠어.'
아, 완벽하게 노골적이지만 사랑스럽다.
그냥 하는 아무 말
가끔 스트레스를 너무 받을 때, 내 글을 찾아 읽곤 한다(?? 이 지점부터 좀 이상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음). 읽다 보면, 내 글이라는 걸 어느새 잊고서 ‘헐, 어떻게 이렇게 내 생각을 그대로 표현해놨을 수가!’라고 감탄하며 좋아하다가 이내, ‘아 내가 쓴 거였군ㅋㅋㅋ’ 빙구 짓을 하곤 하는 것이다. 뭐, 봉감독에 비하면 스케일이 매우 작지만, 어쨌든 봉감독도 이런 비슷한 거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편해지고, 자꾸 ‘귀여움’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헐.ㅋㅋㅋ 내가 찍었지만 정말 재밌군.’
막 이런다는 거 아냐!
....... 음... 아무래도 다 쓰고 보니 리뷰라기보다는, 덕력 충전 밤샘 기도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살면서 이렇게 이유 없이 무작정 좋은 사람들과 영화를 만날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요? 찬양할 수 있을 때 찬양하며 살겠읍니다. (당당)
(+) 참, 언젠가 안서현 배우의 프로다움을 차냥하는 매우 길고 긴 글을 쓰고야 말겠읍니다. 사..사라해 서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