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퇴사를 결정한 후 가장 힘들었던 건 장모님과 대면하던 때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은 선명하다. 나의 결정을 이해하고 응원해 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당신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이십여 년 간의 직장생활 소회와 앞으로의 포부 같은 건 들어줄 여유가 없으신 듯했다. 나는 그저 죄인이었다. 난 당신의 소중한 딸과 애지중지하는 손주들을 고생시키려고 작정한 책임감 없는 가장에 불과했다. 정년까지 다니지 않을 회사였다면 왜 당신의 딸과 결혼을 했고,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가던 때 둘째는 왜 낳았으며, 그동안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지 않느냐는 꾸지람과 원망이 이어졌다.
나 역시도 화가 났고, 서러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다할 수는 없었다. 어르신과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게 뻔했다. 돌이켜보니, 장모님과 함께 산 세월이 10년도 훌쩍 넘는다. 모시고 살았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장모님 덕에 집안에 별다른 우환이 없었고, 아들 둘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키울 수 있었다. 워낙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심성이기도 하지만, 깊은 속내는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 희생하신 면이 컸으리라. 딸은 퇴근하고 와서도 집안일하랴, 아이들 공부시키랴, 늦게 퇴근하는 남편 밥까지 챙겨주는 걸 옆에서 지켜봤으니,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그 와중에 난데없이 사위의 퇴사라니, 어쩌면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결국 내가 다 짊어지고 가야 할 몫이다. 말로 백날 믿어달라고 소리쳐봐야 공염불에 불과하다. 스무 살 무렵 서울로 올라와 28년을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살다가 처음으로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했다. 어려서부터 내 뜻대로 살았더라면 천방지축 소리는 들을지언정 인생의 새로운 도전 혹은 방향 전환이 자연스러웠을 텐데, 흔히 말하는 범생이로만 살다가 중년이 지날 무렵 갑자기 '칼로 무를 썰겠다'고 나선 셈이니, 누가 보아도 위태로운 선택이다. 그리고 가장 어색한 건 나 자신이다. 새로운 일을 배우려니 낯설고, 순발력도 예전만 못하다.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만 굴리다가, 갑자기 몸을 쓰려고 하니, 체력도 금방 소진된다. 고3 수험생도 아닌데, 벌써 코피만 몇 번째다.
그래도,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일이기에 꿋꿋이 해낼 자신이 있다. 3월 월급은 지난달의 반도 되지 않겠지만, 생생한 꿈의 크기는 비교 불가할 정도로 커졌고, 손에 잡힐 거리에 있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들에게는 더 여유로운 가장이어야 한다. 퇴직금과는 별개로, 어젯밤 아내에게 천만 원을 송금했다. 거기엔 장모님의 용돈도 포함되어 있다. 회사 그만두면 당장 소득이 끊기는 줄로만 생각하셨던 장모님도,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내가 여전히 소득을 창출하고, 평소보다 많은 용돈까지 챙겨드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무언가 다시 생각을 해보시는 것 같다. 갑자기 파전도 해 주시고, 찌개도 끓여 주신다. 아내도 출근길에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스콘과 아메리카노를 선물하며 내게 은근히 힘을 실어준다. 장모님도 아내도, 기왕 벌어진 일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장모에게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들 한다. 사위된 지 이제 고작 20년 됐으니, 80년 정도 남았다. 함께 살아갈 날이 몇 곱절은 더 많다. 이젠 내가 제대로 모시고 살기로 다짐해 본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밖에 없다.
상처는 아물고, 백년손님은 그렇게 가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