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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히 Dec 24. 2020

종말을 면한 다이어리

'아기를 낳으면 끝'이 아닌 것


아기를 낳으면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한동안의(또는 영원한)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예고를 자주 접했고, 그때마다 서글펐다. 가령 온전히 쉴 수 있는 하루, 홀로 또는 둘이 가뿐히 떠나는 여행, 한때 신고 뛸 수도 있었던 하이힐, 사실 좋아하는 짧은 치마, 식물과 소품들이 마음껏 늘어져 있는 집, 나를 위한 배움, 원하는 하늘색의 시간을 골라 거니는 고요한 산책, 하고 싶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즉시성 등. 다이어리를 쓰는 일도 그중에 있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잔뜩인 편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별명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별명이 '캐리어 누나' 였단다. 모든 과목의 책을  보고 싶었고, 몽땅 들고다니기 위해 캐리어에 한가득 털어 넣고 끌고 다녔었다(그때까지도 키가 1mm라도  크길 바랐기에, 일말의 희망을 담은 캐리어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정만 과도하다 보니  많은  어떻게  할까 싶어  시작부터 안절부절한다. 그럴 때마다 손으로 다이어리를 쓰며 들쭉날쭉 올라오는 부산함을 가지 쳤다.


그런데 아기를 낳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커녕 아기를 위해 해야  일이  하루를 가득 채울뿐더러, 부산함을 정리할 시간 같은  사치일  같았다. 그래도 습관을 끊고 싶지 않아 만삭인 때에 2020 다이어리를 조심스레 샀었는데, 1월을 시작하며 '과연 올해 내가  다이어리를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레 자문했다.


은근한 반전으로, 2020 다이어리를 지속적으로 채울  있었다. 매일  것은 아니지만, 드문드문 꾸준히 썼다.  말인즉슨, 어느 시점부터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이 작지만 착실히 주어졌다는 뜻이고,  일들을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있었다는 징표다.

며칠 전 이든이를 재우던 한 밤에, 옛 동료가 쓴 책의 온라인 북토크를 들었는데, 그분이 한 말 중에 내가 꼭 붙잡은 말이 있다.


"오늘 내가   있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도 유능함이다."

그 문장을 마음에 집어넣은 채 올해 꾸준히 쓴 다이어리를 보면, 멈춰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기분을 떨치고 내 안에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유능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21년을 앞두고는 스벅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다. 여러 다이어리를 써봤지만, 몰스킨의 종이가 좋다. 같은 종이 무게의 다른 다이어리들에 비해 비침이 적어 형광펜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월간 계획의 일주일이 일요일부터 시작하는 걸 선호하는데, 몰스킨은 월요일 시작이라 그게 좀 아쉬웠다. 근데 스벅 다이어리는 몰스킨이면서도, 일요일부터 시작하는 월간 계획이라 내게 너무 찰떡같은 다이어리였다.


결심이 취미인 내가 2020년 초에는 어차피 이루지 못할 결심들을 하는 게 두려워 아무 결심도 하지 못했었다. 할 수 있는데 못한 것과 할 기회가 없어서 못한 것의 차이는 있다. 전자에는 털어낼 아쉬움이 있었다면 후자에는 깊은 서글픔이 있었다. 늘 전자로 살다가 2020년에는 후자의 상태에 스스로를 가두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연말이 돼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내년을 앞두고 새 다이어리 속지의 2021 버킷 리스트, 1년 목표, 데일리 목표, 위클리 목표를 신나게 채웠다. 이 중 몇이나 이룰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냥 마음껏 설레어할 수 있게 나를 내버려 뒀다.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다 보면 따라오는 설렘은 다이어리와 함께 한동안은 포기했던 설렘이었는데,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내가 그러는 동안 이든이는 자다가, 먹다가, 기어 다니다가 하며 함께 있었다. 출산과 육아로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종말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종말을 비켜나와 살아남은 것들도 선명히 있다. 여전히 할 수 있는 틈새를 발견했고, 그 틈새를 붙잡고 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어렵다. 아무것도 못한 것 같은 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은 그보다는 나은 다음 날을 보내게 되곤 한다. 이 모든 건 나의 노력뿐 아니라 아기의 기질, 남편의 역할, 친구들의 도움, 하나님의 인도하심 등 갖가지 요인이 주저앉는 나를 살포시 받쳐주기 때문이란 걸 안다.


그렇게 가까스로 종말을 피한 귀중한 설렘을 가지고, 2021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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