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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08. 2022

더욱 더 먼 곳

   새벽부터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다. 폭풍이 북상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루 종일 하늘이 흐리더니 일몰이 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겨울비였다. 서점 주인 C는 비 오는 날의 번개 모임 <산해경>을 소집할 참이었다. 단체 문자로 공지 내용을 입력하고 보냄 키를  막 누르려는데 진동음이 울렸다.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이 시간에 스팸은 아닐 것 같아서 받아야 할까 망설이다가 거절을 누르겠다고 한 것이 응답을 눌러버렸다.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이름을 듣고도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목소리를 한참 듣고 나서야 10년 전쯤 영국 여행 중에 만난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베이컨의 초상화처럼 흐릿하게 뭉개진 기억 속 얼굴. 잘 지내냐고 묻더니, C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어물어물하는 사이, 자기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말한다. 그 순간 늘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기억나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불편한 심정이 올라왔다.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다. 그는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좋다며 언제 얼굴 한 번 보자고 말한다. 실은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자고, 언제 술 한 잔 하자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그는 처음보다 밝아진 톤으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기 번호를 저장해 두라는 말을 마침표로 찍고는.     

 

  언젠가 영국의 미술 비평가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베이컨은 "사람들은 사실 앞에서 불쾌해지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C는 기록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가 이거였나 생각하면서 베이컨의 화집을 오랜만에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좀 전에 받은 번호에 수신거부를 걸어놓았다.

  

  빗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작아졌다. <산해경> 회원 한 명이 눈앞에 서 있었다.  비올 때마다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모임이었다.

    “비가 와서, 번개 치실 줄 알았는데요.”

    “안 그래도 문자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네요.”

    “비가 많이 와요.”

    “그러게요. 지금 다른 분들께 문자 전송할게요. 책 좀 보고 계세요.”     


    금요일 저녁 이어선지 세 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오늘은 단출하군요. 전 이야깃거리가 떨어져서, 모모님이나 가을 하늘님이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제가 볼 땐 막 이야깃거리가 생기신 것 같던데...”     

    모모라는 닉네임의 회원이 뭔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서점 주인 C를 쳐다봤다.     

    “훔쳐보려고 한 건 아니고, 비 좀 맞다 들어가려고 공원에 있다가 우연히 봤어요. 전화받으시는 표정이 심상치 않으시던데... 제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시고.”     

   촉이 발달했다고 해야 할까,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C는 스멀거리는 불쾌감을 지그시 누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별로 재미는 없을 텐데요. 비가 그치면 딱 끝낼 거니까 계속해달라고는 하지 마세요.”     


   C는 영국 남쪽 바닷가 마을에 우체국을 겸한 작은 상점이 있었어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모임의 기록을 맡은 모모는 노트를 펴고 C의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적기 시작한다.      

  - 바닷가 풍경이 박힌 사진엽서에는 글자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의미 없는 글자 몇 자 보다는 일몰을 보여주는 것이 나으리라.

  모월 모일 모시.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계곡 위.

  칼바람 부는데 잔디는 파랗고.

  6월에 입고 있는 겨울 코트를 아무리 꽁꽁 여며도 파고들어 오는 바람.

  이빨을 덜덜 떨면서도 이곳의 일몰을 계속 보고 싶어 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잘 지내라는,

  야박하게도 마음 하나 담기지 않은 인사(언제 술 한 잔 하자는 말처럼 실없는.)

  그러나 이마저도 넣지 없으면 너무 냉정해 보일 것 같아서 빠트릴 수는 없는 인사.

  그리고 ps. 여기 바다에서는 비린내가 나지 않아......


   어떻게 유도를 해도 C는 지난 삶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이야기를 통해서만 자기표현을 하는 편이었다. 현재의 지인들이 띄엄띄엄 들은 말들로 추정하는 C의 지난날이라면, 3년 정도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가 다른 직장을 찾기 전에 꽤 긴 여행을 했고, 돌아와서는 집에 있던 책들로 동네 서점을 열었다는 것 정도다. 여행을 떠났던 시점에 C는 잠깐 사귀던 애인과 헤어진, 아니 헤어지려고 했던 것 같다. 모모는 일몰 사진이 담긴 엽서에는 어떤 이별의 언어가 어울릴까 잠깐 생각했다.


  - 돌아오고 몇 달 후까지도 이 동네에 대한 기억에는 나무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땅에 뿌리박은 나무 향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집에서 나는 냄새.

  영국 남자와 스페인 여자가 살던 하얀 집의 냄새.

  우리나라 통나무집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냄새.

  만나는 나무마다 맡아봤지만 결국 찾을 수 없던 냄새...

  바닷가를 따라, 처음 걸어보는 이국의 골목길을 따라 공기처럼 흘러가는 C의 이야기에는 뭐라 명확히 그려낼 수 없는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야기 속에서 그 동네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때 비가 그쳤고 모모의 노트에는 '냄새'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만한 시가 한 편 남았다. 평소처럼 모모는 그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모모가 이런 식으로 시를 쓰는 것이 께름칙해서, "제 이야기는 그냥 듣고 잊어주세요. 어차피 재미 삼아 지어낸 픽션인걸요”라고 부탁하기도 했으나 낭독된 시는 의외로 좋았고, 나중에는 개의치 않게 되었다.      


  모임을 파하고 홀로 서점에 남은 C는 서점 안 쪽 자신만의 서가에서 제발트의 책을 꺼냈다.     

  ‘그리고 더욱더 먼 곳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마지막 빛 속에 잠긴

  이방의 땅, 아직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아프리카 대륙 위로

  탑처럼 솟은

  눈과 얼음의 설산‘ (<자연을 따라. 기초시>, p.139.)     

   비 맞은 창에 손을 대니 손끝이 시리다. 시인 P가 서점 게시판에 시 한 편을 꽂아두고 간 것이 지난해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서점 주인 C는 창밖을 내다보며  첫눈이 소담스럽게 내렸던 그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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