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는 여러 개의 우주를 넘나들었다.
전날의 꿈이 새벽까지 이어졌고, 꿈속 세계는 고단했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그의 꿈에 등장해 새로운 인연을 엮었다. 꿈에서 그는 바라보는 자였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인데도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꿈속 인물들은 그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 대화를 나누며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 속에 낄 수는 없었지만 상황이 주는 긴장감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는 그들이 전혀 다가올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웠다. 쫓는 자도 없는데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달려도 출구는 보이지 않고 뭔가가 계속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풍경이 압축되면서 그 안에 갇히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기둥. 그는 퍽하고 부딪혔고, 이 냄새는, 무슨 나무였더라, 하는 생각이 올라온 찰나, 잠에서 깨었다. 깨어나서 꿈속의 인물들을 기억해보려 했으나, 낯익은 인물들이라는 것 말고는 누군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서점의 단골들인가, 싶었다.
요즘 날이 좋아 그런지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멍하니 앉아 있기도 뭐해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궁리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아마 그래서 꿈이 복잡했나 보다고 서점 주인 C는 생각했다. 새로 들어온 그림책을 배가해놓고 자리에 앉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설핏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온기가 느껴졌다. 햇살이 서점의 전면 창 안으로 들어왔다. 창에서 가까운 탁자 다리에 걸쳐진 무지개가 눈에 들어왔다. 일곱 빛깔이 선명했다. 어쩐지 행운의 징조 같아서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핸드폰을 찾는 사이 무지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조그맣고 하얀 강아지 인형을 안고 있었다. 문 쪽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일곱 살쯤 된 아이는 혼자 온 것 같았다. 아이의 시선이 사자 그림이 그려진 책의 표지로 향했다. 제리 핑크니가 그린 <사자와 생쥐>였다. 아이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 책 보고 싶은 거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손에 든 아이는 서가 안쪽에 마련해둔 아이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 장 한 장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책을 보기 시작했다. 딱히 해줄 일이 없어서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번 주 작가 강연회 준비나 마저 해야겠다 싶어 컴퓨터를 켰다. 메일로 들어온 강연 원고를 읽고 있는데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아이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따뜻하고 깊은 눈을 가진 아이였다. 아이가 보내주는 미소에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엄마가 사준 동화책 전집에 푹 빠져 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딱 저만한 아이였는데, 그때의 나도… 아이에게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아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누가 있었던 흔적도 없었다. 아이가 앉아 있던 의자에는 <사자와 생쥐>가 놓여있었다. 문을 열고 나갔으면 풍경 소리가 났을 텐데. 그러고 보니 아이가 들어올 때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문가로 가서 풍경을 확인했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가벼운 풍경소리가 났다.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다. 문을 열었다면 이보다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아이의 미소가 기억났다. 분명 저 자리에 아이가 있었고 아이는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아이가 여기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은 미소 밖에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돌아왔다. 몰바니아로 갔던 그녀. 공항에서 막 오는 길인지 여행 가방을 끌고 서점을 지나쳐가는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스프링처럼 의자에서 튀어 올라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열리면서 바람이 그녀에게로 확 불었고, 고개를 돌린 그녀는 상기된 표정의 서점 주인 C를 보았다. 그녀가 웃었다.
“이제 돌아오셨군요.”
“네.”
“여행은 어떠셨어요?”
“나중에 들려드릴게요. 제법 괜찮은 여행이었어요.”
그녀가 다시 웃었고, 서점 주인 C는 수줍은 미소로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 노을은 유난히 아름답다고 C는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찾는 책 있는데, 여기 주인 되시나요?”
긴 니트 카디건을 여미며 들어온 손님은 <사자와 생쥐>를 찾았다.
“<사자와 생쥐>라는 제목의 그림책이 여러 권인데 여기 제리 핑크니 작가의 책이 어떠실까요? 글 없는 그림책인데 그림이 아주 멋져요. 그림을 보면서 아이한테 이야기를 지어보라고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이는 없어요. 제가, 보려고요.”
“앗, 죄송합니다. 전, 그냥.”
“괜찮아요. 아무래도 그림책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이 책 좋은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머쓱해진 서점 주인 C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손님을 문밖까지 배웅했다. 손님은 길을 건너 골목길로 사라졌다. 손님의 여윈 뒷모습에서 문득 조그맣고 하얀 강아지 인형을 안은 아이의 모습이 느껴졌다. 둘의 잔영은 그날 서점 문을 닫을 때까지 몇 번 더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이는 다시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