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익은 실루엣이 서점을 휙 지나간다. 한 때 단골이었던 J가 서점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간다. 고개를 푹 숙인 인생 하나가 스윽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데 겨울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다.
J의 낡은 운동화 뒤축에서 서점 주인 C가 읽은 인생은 이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 기자, 광고기획사, 출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자신의 진짜 재능을 발견했다면서 라면가게를 열었다. 테이블이 3개밖에 없는 아주 작은 식당이었다. 바로 옆 김밥집은 처음에 약간 경계심을 갖긴 했으나 오직 라면만 판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김밥을 사가는 손님들에게 옆집 라면가게를 소개하는 선심을 쓰기까지 했다. 바지락 라면, 고추장찌개 라면, 고기 라면... J가 오랜 자취생활 중에 개발한 나름의 수제 라면들은 제법 인기를 끌어서 테이블이 비는 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J가 꿈꾸던 인생은 실은 이러했다. 조직 생활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J는 자신의 마흔 번째 생일날, 꼬마였을 때 말고는 왕래를 하지 않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고모에게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자마자 바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주변에서는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고 말렸지만, J는 사무실에서는 숨도 쉴 수 없다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J는 단골 서점의 여행서적 코너에서 며칠 살다시피 한 끝에 대략의 여행 루트를 정하고는 커다란 트렁크를 사서 짐을 꾸렸다. 그리고 볕이 아주 좋던 어느 날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짐과 몸을 실은 뒤 다시는 누구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던 보통의 날들에 그는 작은 가게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고 매일 저녁 마감하면서 그날의 매상을 정리하는 일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만 그의 노모는 한 때 촉망받던 아들이 고작 라면가게에 정착한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아들의 인생은 이러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남다른 면이 있었다. 구태의연한 일이나 틀에 박힌 일에는 도무지 맞지 않는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아들을 웬만한 회사에서는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도 착한 아들은 부모가 근심하지 않도록 자신의 성정을 누르고 최대한 회사에 적응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어느 회사나 그렇듯 능력이 특출 난 인재에 대한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결국에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직장을 전전하는 동안 아들의 건강은 나빠져서 이제는 정규직으로 일하기는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 알지 않느냐면서 노모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혼자 있는 아들이 걱정되어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했지만 부모님께 의지해서 살지는 않겠다는 독립심 강한 아들을 말릴 수가 없었는데, 기특하게도 최근에 식당을 개업해서 꽤 장사가 잘되고 있다면서 노모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들이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성실하고 부지런하다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어디 매이는 것 보다야 할 수 있으면 자기 사업하는 게 좋죠, 좋고 말고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가게에 손님이 꾸준히 들면서 J의 머릿속에서 분주히 돌아가던 여러 인생들은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피곤하다'는 느낌 말고는 별다른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된 어느 날, 커다란 트렁크와 함께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싣는 J의 꿈의 인생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바로 그날이 서점 앞을 스윽 미끄러지듯 지나간 날이었는데, 실제 그의 하루는 이러했다.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J의 머릿속으로 새로운 라면 레시피가 떠올랐다. 소고기와 야채를 간장과 마늘 양념으로 볶은 다음, 따로 삶아놓은 라면과 함께 서빙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먼저 한 번 만들어서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침대를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선 참이었다.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라면을 삶고 있던 J의 뒤통수에서 서점 주인 C가 읽은 인생은 단순하고 소박한 기쁨이 있는 세계였다. 하늘은 그지없이 높았고 그리워할 다른 인생이 없어진 J는 딱 맞춤하게 삶아진 라면 냄새를 맡으며 망설임 없이 봄으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