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의자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작은 서점 공간에서 무슨 공연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서점 주인 C는 염려의 말을 했으나 그는 충분하다고 했다. 아쉬운 대로 최대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의 낮은 신간 서가와 티 테이블을 치우고 서점 옆 벽에 등을 대고 있던 벤치의자들을 객석용으로 들여놨다.
그의 그림책 출간 기념행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끝에 작가의 의견에 따라 준비한 공연이었다. 공연이라기보다는 퍼포먼스에 가까울 것 같았지만 당일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용을 가늠하지 못했다. 그의 첫 책은 글 없는 그림책이었다. 누군가의 뒷모습만 그려서 완성한 그림책은 표지부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궁금증을 유발하면서도 쓸쓸한 느낌, 배경도 거의 생략되어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뒷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물에 가까워 보였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참석자가 10명이나 되어 서점 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작가는 낚시용 접이 의자와 이젤, 화지를 몇 장 끼운 화판과 목탄 등 화구를 담은 네모난 상자를 들고 들어와 의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젤에 화판을 세우고 목탄을 하나 집어 든 작가가 행사에 참석한 독자들을 둘러보았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친 독자는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작가가 앞으로 나와 달라는 눈짓을 하며 손으로는 의자를 가리켰다. 여자는 멈칫멈칫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작가는 눈을 감아달라고 주문했다. 여자는 당황했다. 작가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라는 의미였다. 여자가 눈을 감았다. 긴장해서 그런지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작가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편안히 계세요. 좋은 생각, 행복한 상상 하시면서요. 미간의 주름이 천천히 펴졌다. 여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지자 작가가 목탄 쥔 손을 화지로 뻗었다. 장내가 고요했다. 화지위로 목탄 지나가는 소리만 서걱서걱, 옆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말없이 그림 그리는 작가와 눈 감고 앉아 있는 모델,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이 어우러진 침묵의 공연이었다.
모델은 관객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모델이 느끼는 긴장감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모델이 편안해지자 관객들의 긴장도 풀어졌다. 관객들의 시선은 목탄의 움직임을 따라갔고, 목탄이 멈추면 관객들이 숨소리가 멎었다. 그렇게 삼십 여 분의 침묵 속에서 관객들은 차례차례 모델 세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 세 명의 독자가 참여한 공연은 목탄 드로잉의 리듬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았다. 서점 주인 C는 완성된 드로잉 세 점을 독자들 쪽으로 돌려놓고 작가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눈을 감은 초상화들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델이 되었던 세 명의 독자는 그림 속 얼굴을 마치 낯선 이를 만난 듯이 바라보았다.
“처음이에요. 이런 얼굴은.”
“눈을 감은 자기 얼굴을 볼 수는 없으니까요.”
작가의 말에 참석자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떠시던가요?”
작가가 물었다.
약해 보였어요. 허전해 보였어요. 좀 전에 본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낯설었어요. 껴안아주고 싶었어요, 다른 뜻은 없고요. 제 뒷모습은 어떨까 궁금했어요. 무너질 것 같았어요.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제 인생처럼 느껴졌어요...
독자들의 응답에 작가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제 그림책의 존재의 이유 말이죠.”
“다음엔 눈 감은 얼굴들로 그림책을 만드실 건가요?”
“글쎄요. 좀 더 그려보고요.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눈 감은 얼굴에 왜 끌리는 건지 말이죠. 그게 명확해지면 다음 그림책으로 묶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홀로 남은 서점 주인 C는 문간에 남겨진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감는다. 비가 시작되었는지 서점 밖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 몸이 기울어지는 것도 모르고 잠시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