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달의 궁전>에는 주인이 반기지 않는 단골이 한 명 있다. 그는 항상 혼자, 마감 시간 한 시간 전에 술집에 들어온다. 취객들이 얼큰히 취해서 술이 술을 먹는 시간. 늦게 들어오는 손님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시간. 그중 이 단골손님이 유독 반갑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이상한 행동 때문이다.
처음엔, 혼잣말을 좀 하는군 하고 넘겼다. 혼잣말이 너무 길어질 때는 누구랑 통화를 하나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옆 테이블 손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여기 안주 맛 괜찮지요? 자주 오시나 봐요, 전에도 뵌 것 같은데, 정도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옆 테이블 손님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 손님은 당황스러워하다가 어찌어찌 이야기에 끌려들어 가곤 했다.
가끔은 그의 그런 행동이 먹힐 때가 있었다. 마침 옆 테이블 손님도 혼자 술 마시기 적적했다든가, 혹은 심정이 팍팍해서 비록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야기를 걸어주는 것이 싫지 않을 때라든가. 그러나 대개는 낯선 사람이 풀어놓는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이야기가 반가울 리 없었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만 하지요. 내가, 그러니까 내가, 있잖아 내가, 내가 보기엔, 나는 그러니까, 내 말은…아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 하고 손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달의 궁전> 주인이 아예 작정하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준 적이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금요일 밤이었다. 단골손님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주인의 태도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눈에 힘이 풀리면서, 제 얘기는 사실 별거 없어요, 하며 내빼듯이 시작하는 그에게 주인은, 괜찮습니다. 저도 별로 재미있는 인생은 아니었거든요,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주문했다.
모든 실패한 인생 이야기가 그렇듯 그의 이야기에도 후회와 자책, 아쉬움과 미련이 가득했다.
“고집이 세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땐 답답했죠. 내 뜻대로 하려고만 하면 주변에서 막는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내가 만든 틀에 갇혀있었다는 걸 이제 알겠어요. 마음을 좀 열었다면, 그렇게 빡빡하게 살지 않았다면, 인생이 훨씬 수월했겠죠. 생각해보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무도 믿지 않았던 거죠. 실은 나 자신도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의외로 내가 싫어하던 사람 덕분에 일이 풀린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또 자기가 하기 싫은 일 나한테 주는 거겠지 하고 별생각 없이 일을 받았는데 그 덕분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더 나쁜 일을 피하게 됐던 적이 종종 있었거든요. 아예 이렇구나 저렇구나 생각을 안 하고 그냥 하니까 됐던 거 같아요. 사장님은 어떠세요? 삶이 원하는 대로 풀려왔나요? 전 모르겠어요. 뭘 좀 해보려고 하면 막히고, 어디 좀 가려고 하면 뭐에 걸리고, 도대체 뜻대로 된 일이 없었거든요...”
잘 나가던 회사를 박차고 나오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꼬였다고 하는데, 애초에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거냐는 주인장의 질문에 그는 입만 오물거릴 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힘없이 내뱉은 말이 이거였다. “글쎄요. 뭐에 씌었었나 봐요.”
뭐에 씌었다고 하면 술집만 한 곳이 있겠어요?라고 주인은 농담 삼아 말했는데 그 말이 단골손님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막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맥주 한 잔을 들이켜더니 그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난 아직도 뭐에 씌어있는 걸까요?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거겠죠? 그런데, 그런데 말이에요, 이렇게 못 내려놓는 건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요? 필연이랄까, 그런 거요.”
주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서 원하는 삶을 살아보라고, 아니면 아예 다른 방식의 삶을 찾아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 봐야 남의 말 아닌가. 한 시간여 그의 말을 들어주었지만, 작은 위로 따위. 그게 뭐란 말인가. 술집 문을 닫을 때쯤이면 늘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함이 몰려왔다. 술집 문을 닫고 걸어 나오는데 낮에 읽은 페소아의 글귀가 문득 떠올랐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완전해질 수 있다.’
공기가 차갑고 맑다. 겨울밤 별자리가 선명하다. 이 고요하고 광활한 공간을 채우는 건 밤의 침묵 그리고 풀벌레 소리. 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