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색이 바랜 편지지 몇 장을 들고 일어섰다.
“이건, 얼마 전에 발견한 거예요.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보내려고 쓰신 것 같은데 겉봉도 없고, 보내시지 못한 편지 같아요.”
<자서전 쓰기> 강좌 4회 차 날이었다. 어머니의 자서전을 대신 쓰겠다고 강좌에 참여한 그가 발표하는 첫 번째 원고였다.
“그냥 읽겠습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처음부터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어. 뭔가 개운치 않았으니까. 대로가 아니라 뒷골목을 헤매는 느낌이랄까. 밝은 날 네 손을 잡고 천천히 걷고 싶었지. 누가 보든 상관하지 않고.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이야. 그런데 그건 애초에 무리한 소망이었고. 난 널 보지 않는 쪽을 택했지. 그렇게 나는 뒷골목에서 대로로 나왔는데 오랜만에 쏟아지는 빛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어. 더군다나 밝은 곳에서 드러난 내 모습이 어찌나 칙칙하던지. 바로 숨고 싶더라고. 빛에 익숙해지고 나서 바라본 세상도 그리 아름답진 않았어. 하지만 난 어떻게든 버텨야 했고, 그래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 이런 문제는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 친구도 몇 명 없었지만..."
처음에 그의 목소리에 쏠렸던 시선들이 하나둘씩 허공을 헤매기 시작하더니 창가로, 서가로 이동했다.
그중 어떤 시선이 무심히 서가를 훑다가 책 한 권에 닿았다. 베르나르-마리 콜테스의 희곡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책등에 한참 머물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 시선은 이제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땅과 하늘 어디쯤에서 부유하는 목소리. 결코 이르지 못할 길 위에서 떠도는 목소리.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고단한 독백 혹은 결코 만나지 못할 누군가와의 대화. 시선의 얼굴이 다시 편지를 향해 올라왔다. 편지를 읽던 그는 시선의 얼굴에서 공감을 읽었다고 생각했으나 시선은 금방 얼굴을 지우고 서가 한 귀퉁이 햇빛이 내려앉은 곳으로 도망쳤다.
창가로 향하던 시선은 유리창에 막혀 멈췄다. 유리창 너머로 공원의 나무들이 바람과 놀고 있었다. 나뭇잎들의 춤사위가 명랑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시선에 물기가 맺혔다. 비가 오려나, 물기 어린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회색 구름이 흰 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회색 구름은 오래된 걱정덩어리로 보였다. 비가 오면 풀리려나... 편지의 목소리가 시선을 다시 잡아챘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을 했는지. 그것도 거듭해서.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어느새 엉뚱한 사람을, 말 안 되는 자리를 내 발로 찾아 들어가고, 나중에 분명 후회할 일들을 벌이곤 했지. 선택의 결과는 혹독했어. 그렇게 버린 시간, 상처. 내가 지은 업.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야. 널 보지 않기로 한 건 내가 한 선택 중에 그나마 잘한 일이라는 거."
그 순간 빗소리가 창을 세게 때리면서 천둥이 내리쳤다.
시선들이 일제히 창으로 향했고, 목소리는 홀로 제 길을 갔다.
몇십 년 전 그의 어머니의 편지는 그가 알지 못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목소리는 소나기의 물기를 머금고 생기를 되찾은 이야기를 여러 시선들 앞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생전의 어머니가 평생 그에게 낯설었던 만큼...
“그만 읽겠습니다.”
그가 편지를 접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으나 빗소리는 차분해졌다. 낭독이 힘들었는지 자리에 앉은 그의 몸이 의자에 맥없이 풀렸다. 그의 시선이 창쪽으로 움직였다. '그래봤자 편지는 저 유리창 하나도 넘지 못한 거야, '라고 생각한 시선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잡아당겼다.
"내가 널 봤을 때 넌 길 모퉁이를 돌고 있었어.. 난 이런 난장판 속에서 풀밭 같은 걸 찾으려 했어... 친구, 난 이 난장판 속에서 천사 같은 누군가를 찾아 헤맸어, 그리고 네가 여기 있어, 널 사랑해..”
강좌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책을 펼쳐 들고 서 있었다. 그가 멋쩍은 듯 말했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