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P가 산책길에 동네 서점을 발견한 것은 2년 전 겨울,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눈은 회색 보도 위를 폭신하게 덮고 있었고 따뜻한 조명 아래 크리스마스트리까지 꾸며놓은 서점은 아늑해 보였다. 갈색 철제 간판 바로 앞까지 가서야 서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끝없는 이야기,라고 낙서처럼 써놓은 간판을 한참 들여다보던 시인 P는 복잡한 표정이 되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해 가을이 되어서야 시인 P는 서점 <끝없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왔다. 서점에 온 건 오랜만이었다.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온라인 서점에 주문해서 받아보곤 했다. 어린 시절 자주 찾아가던 동네 서점은 헌책방이었다. 겨우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틈 말고는 책으로 빽빽했던 공간이었다. 작은 체구에 선한 얼굴을 한 주인아저씨 옆에는 동그랗고 맑은 눈을 가진 아담한 안주인이 책을 고르는 손님들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그 서점에서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가지고 온 날 P는 소네트를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번역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P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날을 떠올리면 자신의 시는 누군가의 가슴에 닿기라도 할까,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미하엘 엔데를 좋아하시나 봐요.”
불쑥 질문이 나와 버렸다. 서점주인은 시인 P의 목소리에 아까부터 코를 박고 있던 책에서 얼굴을 들었다. 맑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다.
“예? 좋아하죠. 미하엘 엔데, 이야기, 천일야화, 무한담, 그런 것들...”
"다른 건 없나요? 책 말고.”
“다른 거라...... 음, 혹시 이야기를 좋아하시면 비 오는 날 저희 서점으로 오세요. 비 오는 날마다 이야기 번개를 치거든요.”
그렇게 서점주인 C는 P를 이야기 번개 모임에 초대했다.
두 주쯤 지나,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토요일 저녁에 이야기 번개 모임이 열렸다. 서점 입구 게시판에 적어놓은 이야기 번개 모임 안내문을 한참 바라보던 P가 주춤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산한 밤이라 그랬는지 이날은 모두가 무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처음의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몰입해서 듣고 있던 P는 제 차례가 되자 무겁게 입을 뗐다.
“전 이야기에는 재주가 없어서 시를 한 편 가져왔는데 읽어드려도 될까요? 무서운 시는 아닙니다.”
참여자들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얼굴이 붉어진 시인 P의 등을 옆에 앉아 있던 노부인이 톡톡 두드려주었다.
-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일 -
우리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어딘가를 찾아가는
혹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찾아 떠도는
나그네라고 한다면
어둡고 차가운 길에 홀로 서 있을 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사공이 필요하겠지
덮개와 문이 있어서
한기나 냉기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면
더 좋겠고
적당히 대화도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매년 단 20분
지하세계로 돌아가는 연인을 태워주는 사공이라니
너무 슬픈 거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Fare’라는 영화를 보았다.
밤이 되면서 굵어진 빗방울 소리가 P의 시 낭송에 리듬감을 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잠시 서점 안은 침묵과 빗소리로 가득했다. 고개를 든 P와 눈이 마주친 서점주인 C가 미소를 지었고 이어 모임 참여자들의 따뜻한 박수소리로 모임이 마무리되었다.
다음 모임에도 그다음 모임에도 P는 시 한 편을 들고 참여했다. P의 시는 무서운 이야기에도, 슬픈 이야기에도, 웃긴 이야기에도 잘 어울렸다. 모임에 이름을 지어준 것도 P였다.
“이건 마치 산해경 같군요.”
라고 모임 끝에 P가 한마디 했는데, 이야기라는 게 그렇죠. 매의 얼굴에 사자의 몸, 백조의 날개, 뱀의 꼬리, 물에도 살고, 뭍에도 살고, 걷고, 기고, 날고... 참여자들이 한 마디씩 동조하면서 비 오는 날의 이야기 번개 모임은 <산해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해 겨울은 무척 길고 추웠으나 시인 P는 심장의 리듬을 조금씩 되찾으면서 언젠가 봄비 오는 날 모두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