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바람에서 먼바다의 냄새가 났다. 서점 옆 가게를 늦도록 지키고 있던 타로리더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순간 이상한 느낌에 멈칫했다. 바람이 불어서인가, 거리의 풍경이 평소와 달랐다. 서점에서는 주인이 안에 있는지 오렌지색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평소 이 시간의 풍경과 달리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혼자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제법 센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공원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겨드랑이에는 책이 한 권 끼워져 있었다. 그를 거의 스치듯 지나쳐 편의점 쪽으로 길을 건너가는 여자의 손에도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인데도 편의점 테라스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작고 동그란 탁자 하나씩을 끼고 혼자 앉아있는 사람이 셋. 모두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커피나 맥주 캔을 천천히 들었다 내려놓으며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서점 커튼 사이로 책을 읽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탁자 위에는 와인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하마터면 문을 두드릴 뻔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자리에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인근 편의점으로 갔다. 할인 중인 수입 맥주를 골라서 바구니에 담았다. 필스너 우르겔, 페로니, 하이네켄, 칼스버그 안주는 고르다가 마땅치 않아 포기했다. 가게에 남아있는 견과류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라면 등을 먹는 시식대 창문 밖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들이 진지했다. 오늘이 아니면 못 읽을 것처럼. 이 시간에 책을 읽는 것 말고 다른 걸 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듯. 그때 마침 옆의 술집 <달의 정원> 주인이 담배를 사러 들어왔다. 타로리더의 시선을 따라가듯 창밖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편의점 주인에게 묻는 말인지, 마침 시선이 마주친 타로리더에게 묻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답이 궁하기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편의점 주인도 창밖을 보더니 말을 보탰다.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 저녁엔 다들 책을 보면서 술을 드시네.”
“저희 가게도 그래요.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예외 없이 책을 보고들 계시네요. 혹시 어디 방송에서 꼭 읽어야 하는 필독도서라고 소개한 책들이 있는 걸까요? 심지어 메모까지 하면서, 너무 진지하셔서 음악도 조용한 걸로 바꿨다니까요.”
맥주를 사들고 나온 타로리더는 잠시 서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걸어가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저렇게 앞을 안 보고 걷다가는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장애물이 가까워지면 감지가 되는지 알아서 살짝 비켜가면서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들 있었다. 바로 가게로 들어가긴 싫어서 공원 쪽으로 향했다. 공원도 온통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 바람이 세지면서 한기까지 느껴지는데 묘하게 공원 안은 후끈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눈빛이 뜨거웠다. 이 까만 글자들을 오늘 밤 안에 다 먹어치우리라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공원 정자며, 벤치며,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불편해 보일 만큼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 있으니 소외감도 느껴지고 하여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맥주와 안주를 탁자에 펼쳐놓고 한 모금 들이키는데 손이 저절로 책 쪽으로 가는 것이 느껴져 벌떡 일어났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뭔가 있는 거야. 서점에 가서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창틈으로 살짝 보니 앳된 얼굴의 여자가 책을 들고 서 있었다. 타로리더는 얼른 맥주와 안주를 탁자에서 치우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문을 여는데 여자가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
“이 시간에도 상담하시나요?”
“아니요. 안 하는데, 기왕에 오셨으니, 앉으세요. 뭐가 궁금하시죠?”
“책이요.”
“책이요?”
“이 책을 오늘 아침에 택배로 받았는데 누가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그것 때문에 상담을요? 발송인이 안 적혀 있던가요? 우체국에 물어보시는 편이…“
“책 표지에 메모가 붙어 있었어요.”
타로리더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가 내민 노란색 포스트잇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안에 이 책을 다 읽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전혀요. 모르는 작가예요. 읽고 싶었던 책도 아니고. 혹시 스토커가 있는 건가 좀 무서워서요. 요즘 전화가 울리다 끊어지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고. 근데 확실치 않으니 경찰서에 갈 수도 없고, 그래서 왔어요. 진짜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려는 건가, 싶어서요.”
타로리더는 그 순간 뭔가가 떠올라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마침 라면을 먹으며 책을 읽고 있는 손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그 책 오늘 아침에 택배로 받으셨나요?”
목소리가 너무 컸나. 그 질문에 테이블 세 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시는 거죠?”
세 명의 고개가 위아래로 한 번 까딱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묻었다. 더 캐묻지 않고 가게로 돌아온 타로리더는 일단 여자를 안심시켰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동네 분들 모두 오늘 아침에 책을 택배로 받으신 모양이에요. 오늘이 이제 몇 시간 안 남았네요. 서두르셔야겠는데요?”
여자의 얼굴이 파래졌다. 타로리더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아 농담이었어요. 죄송해요, 하고는 카드를 부채꼴로 펼쳤다.
여자는 평범한 카드들을 뽑았다. 카드 배열에 드라마도, 비극도, 빛나는 미래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타로리더가 한 장의 카드를 추가로 뽑았다. 달 카드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보름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둥근달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었을 텐데 오늘은 날이 흐려 달을 볼 수 없었다.
“보름날 태어난 사람은 스스로 꽉 차 있어서 외로움을 안 느낄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아요. 가득 채워진 상태가 아니면 불안하달까.”
여자가 눈이 동그래져서 바라본다. 그 얘기를 왜 하냐는 표정이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죠. 누군가 너무 외로워서 저지른 일이라고요. 하필 보름달이 뜨는 날에, 하필 달이 구름에 가린 날에, 더군다나 바람까지 불어서 가슴을 더 메마르게 하는 날에. 자기가 보낸 책을 사람들이 끼고, 쥐고, 열심히 보고,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나 봐요. 할 말이 얼마나 많으면 저렇게 다양한 책을 보냈을까요?”
“그럼 스토커 같은 건....”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손님의 삶은 아주 평화롭고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평범한 거 사람들이 보통 지루해하시는데 담담한 일상만큼 얻기 힘든 게 없는 것 같아요. 꾸준하게 일상을 사는 힘, 그런 힘을 갖고 계신 거예요. 그 책 재밌을 것 같은데, 오늘 밤 친구 삼아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여자의 얼굴이 들어올 때 보다 밝아졌다. 여자가 나간 후 다시 맥주와 안주를 펼쳐놓은 타로리더는 아까 읽으려다 만 책을 집어 들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이었다. 작가의 이름 때문인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래 너, 이렇게 말을 거는 거구나? 책 표지를 쓰다듬으며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바람이 더 세졌는지 창틀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어두운 거리가 책들의 웅얼거림으로 몽글몽글 채워지고 밤은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