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얼음 같은 여인을 만났고 죽음처럼 사랑을 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한평생......’
시인 P의 습작노트는 여기서 한 줄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어느 새벽 길고 복잡한 꿈에서 깨어난 시인 P는 문득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단 두 개의 문장, 그것도 완결되지 못한 문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P의 삶은 결심과 포기의 연속이 아니었나. 거울 속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 P는 엉성한 끼적임이 부끄러워 멀겋게 빈 줄이 대부분인 리걸패드 한 장을 북 뜯어내 박박 찢은 다음 휴지통에 집어넣는다. 딱히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는 토요일. 해가 뜨니 흐리던 창밖이 차츰 밝아지더니 창문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P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천천히 한 사람이 지나간다. 검은 패딩 차림으로 무겁게 터벅터벅 걷는 여자. 늦가을의 공기는 차갑지만 아직 패딩을 입을 만큼 추운 날씨는 아닌데, 그런데 패딩을 입고도 여자는 추워 보인다. 여자의 옆으로 자전거가 쌩하고 지나간다. 후드티를 입은 소년. 휙 지나가버렸지만 소년의 등은 따뜻하고 단단해 보인다. 추워 보이는 여자는 골목으로 빠졌는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저렇게 매섭게 울 때는 실제로 아파서 우는 거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P는 울음소리를 더 듣고 있기가 힘들어 창문을 닫고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다음 집을 나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늦가을의 하늘 아래. P는 걷고 또 걸으며 빈 종이를 생각한다. 어쩌면 빈 집일 수도, 빈 마음일 수도 있는 P의 빈 종이는 걸어도 걸어도 채워지지 않고, 평생 이렇게 걷기만 하다 삶이 끝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종일 P를 기다렸던 건 앞장이 뜯긴 리걸 패드. 두 번째 장에서는 지난 상처를 극복하고 어떻게든 내용을 채워보려고 서재 구석구석을 뒤져 예전의 메모들을 끄집어낸다. P는 언제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메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다이어리나 노트에 쓴 것도 있고, 워드로 작업한 것을 인쇄해 놓은 것도 있다. 스토리가 꽤 진전된 원고 뭉치도 있었는데 제목을 얼마나 고쳤는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P는 자리를 잡고 앉아 메모들과 미완성 원고들을 읽기 시작한다. 몇 시간이 조용히 흘러간다. 따각 따각 구두 발자국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 P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그리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숨을 들이 마신다.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지나가던 남자가 마침 창문 아래에 있었는지 깜짝 놀라 후다닥 지나간다. P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면서 검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다 휙 뒤돌아서 읽고 있던 메모와 원고들을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쓰레기봉투를 꼭꼭 묶어서 집 앞에 내놓고 계단을 올라오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어깨 위 사선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어둠 속에서 P 쪽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과 마주친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쓰레기에는 고양이도 관심이 없을 테지만. 내 속을 네가 아는가. 그래, 나는 쓰레기를 버린 거야. 기억도 나지 않는 메모들 따위, 쓰다 만 원고들 따위, 그냥 쓰레기일 뿐이라고… 이제 자야지. 그만, 자야지. P는 혼잣말을 하면서 계단을 올라온다. 이날 밤 P는 잠과 꿈 사이를 오가며 긴 사투를 한다. 꿈에서 까만 고양이가 종이로 가득 찬 쓰레기봉투를 헤집는다. 그리고 우는데 고양이가 우는 건지 종이 조각들이 우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는지, P가 눈을 뜬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햇살이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