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반드시, 자주 해야 할 질문
"네 의견은 어때?"
당신은 일상 속에서 한 번이라도 이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어린이들"에게?
***
저녁을 먹고 난 후 찾아온 골든타임. 스페인은 저녁시간이 보통 8시에 시작해서 늦으면 11시까지 이어지는 터라, 스페인의 방송 골든타임은 11-12시이다. 이 시간에는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핵심 예능 프로그램들이 종종 방송된다. (그러니까 한국의 <유 퀴즈 온 더 블록> 같은 국민 예능이 11시부터 시작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만큼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매일 저녁 골든타임 시간대를 장식하는 프로그램들 중 <First Date(지난 글 "¿스페인 지상파에는 '누구든' 출연할 수 있다?" 참고)>과 <Master Chef> 등이 있다.
지난해 3월쯤, 저녁을 먹은 후 여느 때와 같이 <Master chef 8>를 보고 있었는데 그 주가 마침 어린이 전문 셰프들이 멘토로 나오는 특집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니까 성인 후보자들이 경쟁을 하는 와중에 매주 멘토들이 등장하는데 그 주는 5-10살 미만의 어린 셰프들이 멘토로 나왔다.
우선 어린 나이의 전문 셰프가 있다는 자체부터 신기. 어쨌든 어른들의 경쟁 라운드가 시작되자 꼬마 셰프들은 멘토로서 성인들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프로페셔널했다. 지시를 하기도 하고 감독을 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며 한숨을 내 쉬면 서도 자신의 멘티 팀원들(그러니까 본인들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성인 경쟁자들)을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른들의 태도도 놀랍다. 자기보다 키가 절반 가량밖에 안 되는 쪼꼬미 셰프들로부터 질책을 받는데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본인들이 경쟁에 임하다 미식적 고민이 생기면 한점 부끄럼 없이 '미니어처 셰프들'에게 의견과 조언을 구했다.
예를 들자면,
- (어른 셰프가 어린 셰프에게) 여기서 어떤 가니쉬를 하는 게 좋을까, 솊?
- 제 생각엔 보라색 식용꽃을 올리면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이 꽃은 예민하니 매우 조심히 다뤄야 하니 주의해(요)!
- Ok, 솊!
이런 대화가 프로그램 내내 이어지는데 나는 왜 그리 낯설었던지 모르겠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러운, 아이와 어른 간의 동등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
존댓말을 거의 쓰지 않는 스페인
스페인은 존댓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내가 스페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어느 바에 들어가 중년 나이의 바텐더에게 "(극존칭으로) 맥주 한 잔 주세요." 했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 ㅋㅋ
그러면서 나를 보며 허허 웃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까지도. 그러니까 본인들한테(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일지라도) 극존칭 쓸 필요 없다는 거다. 만약 내가 극존칭을 쓰면 그들이 매우 할아버지 같아 보인다는 뉘앙스가 전달되는 분위기인 것이다. (실제 노인분들에게도 tutear(tú;'너'라고 낮춰 부른다는 뜻의 동사)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스페인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런 허물없는 수평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아이들도 어른 선생님에게, 혹은 조부모에게 '너'라고 지칭하지만 이는 무례한 것이 아니다. 이는 각자가 하나의 인격체이고 동등한 입장이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인식되어 있음을 뜻한다. 심지어 내가 마드리드에서 석사를 다닐 때도 교수-학생 간 존칭을 쓰지 않더라. 즉, 마스터 셰프에서의 저 상황도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닌 당연한 풍경이었다. 아이가 어른보다 실력이 좋으면 그 아이의 의견을 따라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아이가 어른에게 질책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만 해도 사정은 다르다. '실부쁠레?'로 상징되는 프랑스어의 극 존칭은 모르는 사람에게 꽤 엄격하게 적용된다. 독일이나 다른 유럽계열 나라들도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네 생각은 어때?"라는 질문의 어색함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네 생각은 어때?"라는 말을 우리 한국사람들은 얼마나 일상에서 자주 사용할까? 친구들, 연인과 약속 장소 정할 때, 밥 메뉴를 정할 때, 어디 놀러 갈 때는 보통 많이 묻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주어진 옵션들 중 '선택'을 하기 위한 질문이지 '의견'을 묻는 것은 아니다. "양식 먹을래, 한식 먹을래?"랑, 지금 휴식시간이 주어졌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의견을 묻는 건 차원이 다르다.
다시 말해, 한국인은 의견을 묻지 않는다. 그저 빠른 질문 분류와 선택을 요구한다. 한국인은 동사(verb)를 묻지 않고 명사(noun)로 묻고, 또 대답하기를 원한다. 의견을 물어보면 빨리빨리 처리할 수가 없거든.
한국의 다소 수평적 문화를 가졌다는 소규모 회사나 스타트업 조직에서는 분위기가 좀 다를까? 정말 드라마에서나 보는 것처럼 직원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을까?
한국에서 "라떼는~"이 괜히 유행된 게 아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사실을 윗세대 사람들은, 실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다. 사실 나는 스타트업에 다녀본 적은 없으나 (가까운 미래에 직접 스타트업 창업을 꿈꾸고는 있다!) 10명 이내의 직원들이 움직이는 작은 조직에 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드들은 여전히 위계와 적당한 수직적 구조를 원한다. 체계를 원하고 정중함을 원한다. 나조차도 실무 경력이 7년 정도 쌓이다 보니, 내가 겪어온 사회경험을 나름 무기로 삼는다. 가끔씩 후배들이 경험이 부족하다고 치부하고 잘난 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드니까 말이다.
30대인 나도 이런데 40, 50대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냥 어른들은 시키는 대로 아랫사람이 해주기를 바라는 어쩔 수 없는 '라떼들'의 마음. 꼰대 세대로 접어드는 게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이게 내 스페인 생활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어떻게 곱게 꼰대가 될 것인가. 지난 20대 동안 쌓여 온 이 편견의 틀들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또한, 한국에서 우리 아이들이 주체적인 인격체로 자랄 수 있을까. 다르게 말하면 그란 아이들을 교육하는 어른으로서 내가 충분한 정신적 자격을 갖추었는가. 한국에서도 스페인 마스터셰프에 나온 어린 셰프들처럼 아이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교육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인드를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이에 또 덧붙여, 나는 내 주변 사람, 동료들엑 진정으로 "그대의 의견은 어때요?"라고 물을 수 있는가. 자꾸 성찰하고 반문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마스터 셰프의 어린이 셰프들은 계속해서 내 맘 속에 상기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