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여행보다 의지하게 되는 기억, 제주 한 달 살기
모든 여행지를 사랑하더라도 그런 여행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타이밍도. 여행 중의 모든 순간도. 여행을 마치고 난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이 많은 완벽함에 가까운 여행. 내 의지로 조종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들어 있기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운 좋게도 생각나는 여행이 있다.
어제 메모를 못 남겼다. 정말 온몸이 피곤해서 생각도 하기 싫었다. 한라산을 다녀왔다.
다녀왔다고 5글자로 표현하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힘이 들었으니 구구절절 반드시 남겨야겠다. (참고로 나는 오름을 제외하면 3년 만에 등산을 갔다.) 1차 대피소까진 가뿐했다. 생각보다 길도 포장이 잘 되어있네! 라며 경치도 보면서 역시 국립공원! 이러면서 올랐다.
문제는 B등급의 코스에 진입하면서부터였다. 와... 정말 힘들었다. 한라산이다 보니 안개가 상시 끼어있기 때문에 부슬비가 곧잘 오는데 돌산은 시작되고 미끄럽고.. 한라산을 오르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래도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아.. 그래.. 좀 짜증 났어도 갈만했다 치자. (이미 종아리 근육이 다 뭉쳤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먹는 컵라면은 행복 그 자체!! 지금까지 먹어본 라면 중 제일 맛있었다! 거의 마셨던 것 같다.
마의 코스 A등급이 살아 숨 쉬는 그 구간은 정말 네발짐승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상 없는 거 아니냐며 다신 안 온다며 아마 오늘 목안이 따가운 이유는 이때 그렇게 투덜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90%까지 차올랐을 때 엄마의 카톡에 또 한 발을 내디뎠고 하산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응원에 한 발을 내디뎠던 것 같다. 포기만 하지 말고 쉬엄쉬엄 한 발씩만 가라고 하셨었지. 정상을 200m쯤 남기고는 방전이었는데 경치는 그제야 엄청났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코앞에 있었고 움직임도 볼 수 있었다. 주변의 나무도 어찌나 신비롭던지 살다 살다 이런 풍경도 보는구나-싶었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오후 1시 백록담 정상 도착. 적어도 운동 1도 안 하는 내게는 인간승리였다.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어렵거나 힘든 일을 만나면 이때를 생각하자. 한 10번은 생각한 것 같다.
아 그런데 등산은 하산이 최고라고 했던가.. 울먹이면서 5시간을 내려왔다. 조난신고하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쉬고 싶어도 곧 해가 떨어져서 쉬지도 못하고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내려왔다. 결정적으로 미끄러운 돌들을 정말 욕하고 싶더라. 덕분에 그날 성판악코스 뒤에서 2등으로 오후 7시에 하산 완료했다^^ 경치도 역대급이었고 얻은 것도 있지만 라면도 맛있었지만 그래도 다신 안 간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