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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Oct 21. 2019

가장 완벽했던 여행이 있나요?

다른 여행보다 의지하게 되는 기억, 제주 한 달 살기

모든 여행지를 사랑하더라도 그런 여행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타이밍도. 여행 중의 모든 순간도. 여행을 마치고 난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이 많은 완벽함에 가까운 여행. 내 의지로 조종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들어 있기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운 좋게도 생각나는 여행이 있다.


지금껏 다녀온 여행 중 가장 완벽하다-싶은 여행을 꼽으라면 단번에 '제주도 한 달 여행'이라고 답할 것이다. 몇 년 전이지만 첫 회사를 퇴사하고 31일간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퇴사를 하고 곧장 한 달 간격의 왕복 제주 항공권을 예매했고 동-남-서의 루트로 각각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 일정 기간씩 그 일대를 경험했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이 완벽했던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1.

제주도는 뚜벅이로 돌아다니다 보면 섬인 것을 망각하게 될 정도로 이동시간이 길어진다. 가까운 데를 가는 것인데도 지도 앱으로 길 찾기를 실행해보면 1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경우가 흔하고 산간지역으로 갈수록 배차가 길어져 다른 곳보다 하루에 여행할 수 있는 여행지가 -1개가 된다.

그런데도 역시 섬이구나! 는 한 달의 시간 중 몇 번이고 깨달을 수 있는데 바로 '비'. 육지의 비를 생각하면 안 된다. 제주도의 비는 강수량도 강수량이지만(우산은 쓸모가 없다는 것은 제주도 장대비 한 번만 맞아봐도 알 수 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데다가 바람까지 오우. 마을마다 날씨가 다른 경우가 있을 정도로 정말 느닷없다. 그래. 제주도는 섬이지.

여행 다니기에는 퍽 안 좋은 조건들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점을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날씨의 까다로움도 이동 시간의 길이도 성격이 급한 나를 느리게 하는 유일한 방법에 가까우니까. 평소에 성격이 급하기 때문에 기다리거나 어떤 할 일을 느긋하게 하는 것을 잘 못하는 나에게는 제주도의 특징이 천재지변같이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느려지기에 딱 좋다. 난 그렇게 제주도에서 느림의 미학을 깨우쳤다.


2,

한 달간 유일하게 꼭! 해야 하는 것이었던 '한라산 정상 실제로 보기'. 한라산은 총 약 10시간의(나에게는) 내 인생에서는 앞으로 절대 없을 대장정이었다. 평소에 산이라고는 동네 약수터도 1년에 5번도 안 가는 사람이 당연히 쉽게 오를 리가 없었지만 너무 심하더라. 그 증거는 한라산을 다녀온 다음 날 작성한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은 웃으면서 있는 생생한 일기의 전문을 공개하면 아래와 같다.


어제 메모를 못 남겼다. 정말 온몸이 피곤해서 생각도 하기 싫었다. 한라산을 다녀왔다.
다녀왔다고 5글자로 표현하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힘이 들었으니 구구절절 반드시 남겨야겠다. (참고로 나는 오름을 제외하면 3년 만에 등산을 갔다.) 1차 대피소까진 가뿐했다. 생각보다 길도 포장이 잘 되어있네! 라며 경치도 보면서 역시 국립공원! 이러면서 올랐다.
문제는 B등급의 코스에 진입하면서부터였다. 와... 정말 힘들었다. 한라산이다 보니 안개가 상시 끼어있기 때문에 부슬비가 곧잘 오는데 돌산은 시작되고 미끄럽고.. 한라산을 오르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래도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아.. 그래.. 좀 짜증 났어도 갈만했다 치자. (이미 종아리 근육이 다 뭉쳤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먹는 컵라면은 행복 그 자체!! 지금까지 먹어본 라면 중 제일 맛있었다! 거의 마셨던 것 같다.
마의 코스 A등급이 살아 숨 쉬는 그 구간은 정말 네발짐승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상 없는 거 아니냐며 다신 안 온다며 아마 오늘 목안이 따가운 이유는 이때 그렇게 투덜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90%까지 차올랐을 때 엄마의 카톡에 또 한 발을 내디뎠고 하산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응원에 한 발을 내디뎠던 것 같다. 포기만 하지 말고 쉬엄쉬엄 한 발씩만 가라고 하셨었지. 정상을 200m쯤 남기고는 방전이었는데 경치는 그제야 엄청났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코앞에 있었고 움직임도 볼 수 있었다. 주변의 나무도 어찌나 신비롭던지 살다 살다 이런 풍경도 보는구나-싶었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오후 1시 백록담 정상 도착. 적어도 운동 1도 안 하는 내게는 인간승리였다.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어렵거나 힘든 일을 만나면 이때를 생각하자. 한 10번은 생각한 것 같다.
아 그런데 등산은 하산이 최고라고 했던가.. 울먹이면서 5시간을 내려왔다. 조난신고하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쉬고 싶어도 곧 해가 떨어져서 쉬지도 못하고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내려왔다. 결정적으로 미끄러운 돌들을 정말 욕하고 싶더라. 덕분에 그날 성판악코스 뒤에서 2등으로 오후 7시에 하산 완료했다^^ 경치도 역대급이었고 얻은 것도 있지만 라면도 맛있었지만 그래도 다신 안 간다^^


고생하는 만큼 기억에 남는다고 했던가. 물론 일기에서처럼 어려울 때마다 한라산을 생각해도 여전히 낙담하고 다시는 산에 안 간다고 해놓고 또 산을 아주 가끔 오르고 있지만, 짜증 난다고 해놓고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일로 삼고 있다. 역시 여행은 미화되기 마련.


3.

제주도에서 언젠가는 다시 장기간 머물러보거나 살아보고 싶은데 그 이유에는 바다와 건물의 높이가 반드시 있다. 제주도에 있으면서 깨달은 건 나는 낮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제주 시내만 벗어난다면 3층을 넘지 않는 키 작은 상가와 집, 그리고 바다는 매일 봐도 좋았다. 오죽하면 매일 일몰을 보러 바다로 향하고 키 관광지보다 마을을 걸은 적이 더 많을까. 돈, 집, 명예 혹은 숫자의 높은 곳을 좋아하는 세상 속에서 살다가 깊지만 겉보기에는 키 작은 바다와 알록달록한 것이 사람이었다면 순수한 어린이일 것 같은 마을 속 집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 낮음이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특히 바다가 주는 것은 뿐만이 아니다.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유독 제주도의 일몰은 매일매일의 색감이 확연히 다른데 핑크빛일 때도 있고 채도 높은 노란색일 때도 있고 온갖 색이 무지개처럼 다 보이는 날도 있다. 그 색감이 바다까지 물들이면 코 끝이 찡해지는 기분이랄까. 매일 일몰이 시작될 때면 마음을 울리는 책을 읽는 시간이 온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굳이 세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그 한 달 속에서 마을 골목골목을 걷고 마을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한라산의 정상을 실제로 보며 제주도의 진짜 모습을 알아갔던 시간. 그와 동시에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심어져 있는 모든 것과 단절된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역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앞으로 행하는 것이 쉽겠지? 언젠가 제주도에서 지내고 있다는 글을 쓰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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