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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Sep 30. 2019

난생처음 결항 문자를 받았다

단순히 못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출발하는 제주행 항공기는 태풍 링링으로 인해 결항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예약 취소 및 여정 변경은 당사 예약센터를 통해...'

무려 하루 전 퇴근길이었다. 회사에 연차 결재를 받고 팀원들에게 '저는 제주도에 갑니다!!'라며 쪽지를 써놓고 집으로 향했던 퇴근길. 회사를 나온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받은 결항 문자에 나는 멘탈이 그야말로 백지가 되었다. 띠이이이-사고 정지-. 처음 받아본 결항 문자라 어떻게 해야 하지? 싶어 일단 문자에 적힌 대로 예약센터로 전화를 했는데 역시 결항이 한 두 편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통화가 될 리가 없었다. '아니 하루 전에 통보를 해놓고 전화도 연결이 안 되면 어떡하라는 거야!' 화가 났다가 어차피 오후 항공편으로 옮기기도 어려울 듯싶어 이내 관두었다. 그렇게 한 달여를 설레며 기다렸던 제주도 여행을 포기했다. 짐을 챙기기 전에 온 것이 다행이네-싶으면서도 울적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나름대로 개인적인 마음 정돈을 위해 가려고 했던 것인데 그 기회를 박탈당한 것 같아 절망을 느꼈더랬다.




놀러가는 게 아니었는데

어? 2020년? 잠이 홀딱 깨더라.

아니 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도는 뭐람?

진짜 2020년이 오는 거야?

아니 그런데 다이어리?

이렇게 얼마 안 남았다고?

누구나 한 해 한 해 되돌아보는 연말이지만, 나는 다이어리 출시에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 편인데 그걸 경험한 순간인 것이다. 으악 진짜 큰일 났다. 올해 나 뭐했지?

이 순간이 다소 급하게 8월까지의 나를(?)을 되돌아보게 했다.

일단 버킷리스트부터 점검을 하자. 작년 연말에 적어놓은 올해 버킷리스트를 보니 이런. 이룬 것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이미 그른 것도 있다. 매년 버킷리스트는 다 클리어했었는데 몇 년만인지라 좀 당황...

이 당황스러움은 30이라는 숫자가 가까워지는 20대 후반이라는 지금 상황과의 성공적인 콜라보로 깊은 고민의 늪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나는 몇 개월 동안 여러 고민을 했다.

'지금 직장이 정말 나에게 맞을까? 딱히 비전은 없는 것 같은데. 일도 잘 안 맞고...'

'예전에 하고 싶어 했던 그 일들을 다시 해볼까?'

'돈은 얼마나 모았지? 정말 세계일주 갈 수 있을까?'

'중국어는 왜 이렇게 안 느는 거야. 포기하기에는 많이 왔고 계속 가자니 돈만 쏟고 있나 싶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어 좀처럼 해결책 없이 고민을 쌓아갈 때. 그때 방법은 이제 하나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고 그렇게 준비했다. 제주도 여행을.




여행도 타이밍이 있다

결항 문자를 받고 한동안 기분이 내가 요즘 자주 듣는 악동뮤지션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들을 때의 기분과 꽤 동일했다. 실컷 울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야 속 시원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울적한 심정이었다. '아잇 괜찮아~제주도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라며 긍정적인 소리를 하기에는 이미 그럴 기운도 없었다. 괜히 다시 제주도행 티켓을 끊고 싶지 않아 졌다.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여행에도 타이밍이 존재한다. 티켓을 끊는 추진력, 그 뒤에 숙소와 일일 경비에 투자할만한 돈을 마련해두는 것, 최대한 절약하며 일상을 지내는 마음 같은 것이 생기는 그런 타이밍 말이다.

게다가 나는 한 번 정말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한 번 마음을 먹었을 때 진행하지 않으면 두 번 세 번이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무조건 처음의 선택과 확신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결항은 단순히 제주도를 못 가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 뒤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으니까.

한 편으로는 이렇게나 나에게 제주도가 큰 영향을 주는 것이었구나-를 나는 그때 깨닫기도 했다. 좋아하는 만큼 상실감도 큰 법이니까.




결국 올해는 제주도를 안 가기로 했다. 그 경비를 연말에 가는 유럽여행에 더하기로 했고. 덕분에 유럽여행은 풍족해졌지만 가끔 드문드문 제주도의 노을이 생각난다. 아무리 자주 봐도 신기했던 그 해넘이를 보고 싶을 때가 일상 속에 종종 찾아온다. 언젠가 다시 제주도행 티켓을 끊어야겠다는 확신이 들 때, 그때는 드디어 제주도에 왔다며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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