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흐르는 사회 2
자살론 5편 6장. 감정이 흐르는 사회 2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1975년부터 16년간 라다크의 문화와 서구화 과정을 기록한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는 결코 먼 나라의 전설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 한국의 농촌과 도시 변두리에도 감정이 자유롭게 순환하는 공동체가 존재했다. 주목할 점은 1980년대 한국의 자살률은 지금의 1/3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시절의 삶이 물질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서로 나누고 흘려보낼 수 있는 사회적 통로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풍경은 단순한 과거의 사진이 아니라, 공동체의 밀도가 어떻게 감정을 지탱했는지를 보여준다. 여름날 마을 사람들이 개울가에 모여 음식과 막걸리를 나누던 철렵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일상의 고단함을 웃음과 이야기로 풀어내던 감정의 해우소였다. 모내기철에 어른과 아이가 함께 논에 들어가 모를 심으며 노동과 생활을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자연스럽게 순환했다.
음식을 나누는 문화 역시 감정 순환의 핵심이었다. 떡과 부침개, 장독의 김치를 서로 나누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이웃집을 드나들며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너와 나' 사이의 담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병이 나면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을 쑤어 나르던 풍경은 개인의 취약함을 감정의 품앗이로 보듬던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풍경이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재현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 감정의 빈곤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이 드라마 속 '정(情)'이라는 이름의 감정 순환 구조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한국 사회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갔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1977년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에 불과했던 시절보다 30배 이상 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행복도도 과연 그만큼 높아졌을까? 사람들은 왜 과거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자살률은 왜 그토록 가파르게 상승했을까?
과거, 마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눈을 마주하던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안부와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이 높아지고, 주거 형태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시선과 인식 구조도 달라졌다. 아파트와 고층 건물과 같은 주거 공간의 수직화는 물리적 거리를 줄였지만, 이웃 간의 시선과 관계망을 단절시켰다. 하루의 대부분을 닫힌 공간 안에서 보내게 되면서, 자연스러운 만남과 대화의 기회가 사라졌다. 인식의 시선은 마주 보는 대신 위아래로 향했고 그 결과, 사회적 관계의 기준은 친밀함이 아니라 위치와 위계가 되었다. 이에 더해 자본은 욕망을 부채질하며 비교와 경쟁의 문화를 한국 사회에 강하게 불어넣었다.
자본의 바람으로 벼락부자가 등장하고, 갑작스럽게 가난해진 사람들이 생겼다. 그것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심리적 빈곤감이었다. 고층 건물에 살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사람들을 좌우, 위아래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질투, 알력, 미움 그리고 부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며 간격은 더욱 벌어졌다.
그렇게 자본이 만든 욕망의 강은 인간 세상의 판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살은, 단지 돈의 결핍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돈이 관계의 장을 나눔에서 경쟁으로 바꿔버린 결과가 낳은, 가장 비극적인 병폐라 할 수 있다.
자본과 디지털이 연결한 오늘의 세계는 외연은 넓어졌지만, 촉감, 연대, 웃음, 울음 같은 미세한 감각들은 잃어버렸다. 그 결과, 감정을 물리적으로 나누고 해소할 수 있는 '장(場)'은 사라졌고, 많은 이들이 감정의 파도를 홀로 견뎌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80년대가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감정의 순환은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멈췄을 때 사회의 자살률도 가파르게 오른다는 사실을...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회복되거나, 그 환경에 의해 더욱 고립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감정이라는 심리적 상태는 사회적 맥락과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이 마련되면 감정은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하고, 반대로 감정을 억압하는 환경에서는 개인의 감정은 굳어지고 서서히 흐름을 멈추게 된다.
인간의 행동은 개인의 고유성과 외부 환경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나는 결과다. 따라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존재할 때, 그곳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정서적 생존의 토대가 된다. 이 정서적 연결망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사회가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러한 정서적 생존의 토대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위한 사회적 설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핀란드 ‘오픈 다이얼로그’ – 대화가 치유다
핀란드의 ‘오픈 다이얼로그(Open Dialogue)’는 조현병, 우울증, 자살충동과 같은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을 약물이나 격리 치료 대신 ‘대화’를 중심에 두고 치유한다. 이 치료의 핵심은 환자를 단순한 ‘치료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다.
치료 과정은 기본적으로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환자, 가족, 친구, 그리고 전문 치료자가 한자리에 모여, 감정을 병리적으로 진단하거나 성급히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그 감정은 왜, 어디서 나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함께 탐색한다. 대화를 통해 이 탐색이 깊어지면서, 굳었던 감정은 다시 흐를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이 접근방법은 감정을 ‘문제’로 규정하기보다, 관계를 통해 그 감정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 데 초점을 둔다. 그 결과 환자는 고립된 ‘병자’가 아니라, 감정과 관계를 회복해 가는 능동적 참여자가 된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오픈 다이얼로그를 적용받은 조현병 환자의 장기 재발률이 기존 치료보다 현저히 낮았고, 약물 복용 의존도 또한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감정이 억압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안전하게 흐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곧 치유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일본 '이부키 센터'- 느슨한 접촉이 만드는 신뢰
일본의 이부키 센터는 원래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를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공간이다. 하지만 그 핵심 목표는 단순히 사회 복귀가 아니라, 오랫동안 차단된 감정의 흐름을 다시 열어주는 데 있다.
이곳의 운영 방식은 강제성이 거의 없다. 방문자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된다.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시간을 보내도, 그것이 ‘비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든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이러한 ‘느슨한 접촉’ 은 억지로 친밀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완전히 닫혀 있던 사람도 스스로의 리듬에 맞춰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관계 형성이 빠르게 이루어질 필요가 없기에, 감정 개방의 속도는 전적으로 개인의 리듬에 맞춰진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정서적 안전감은 깊은 신뢰로 이어지며, 이는 장기적인 회복의 토대가 된다.
결국 이부키 센터가 보여주는 것은, 감정 회복에는 때로 ‘밀착된 돌봄’보다 ‘간격이 있는 돌봄’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억압된 감정은 강제적 개입보다, 안전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서서히 흐를 공간을 만날 때 비로소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방법, 같은 목표
핀란드의 오픈 다이얼로그와 일본의 이부키 센터는 문화와 맥락은 다르지만, '감정이 고립되지 않고 흐를 수 있는 환경'을 설계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
이들의 접근 방식에는 서로 보완적인 가치를 지닌다. 오픈 다이얼로그가 직접적인 관계 회복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촉진한다면, 이부키 센터는 관계의 안전거리를 보장함으로써 감정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기다린다. 하나는 '곁에서 함께 흐르게 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거리를 두고 스스로 흐름을 시작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두 사례는 감정 회복은 단일한 해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상황과 필요에 맞춰 ‘관계의 거리’를 조율하는 사회적 설계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밀착이든 느슨함이든, 감정이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흐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일이다. 결국, 사회는 획일적인 치료법이 아닌, 감정을 품어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그릇'을 설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한국의 소규모 회복 공동체
국내에서도 이러한 원리를 구현하려는 다양한 소규모 공동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자살 유족 모임, 청소년 감정 공유 네트워크, 직장 내 비공식 감정 모임 등은 공통적으로 '감정이 안전하게 흐를 수 있는 물리적, 관계적 공간'을 제공한다. 이 공간들에서는 외부 사회에서 강요하는 평가, 경쟁,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개인의 감정이 검열 없이 발화되고, 그 발화는 즉시 누군가의 진실된 경청과 공감으로 이어진다.
이런 공간에서는 감정이 병리로 쉽게 굳어지지 않는다. 분노, 슬픔, 불안 같은 감정들은 공동체라는 '그릇'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섞이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회복 공동체들은 작은 규모이지만, 사회가 잃어버린 '감정 순환의 장'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하며,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공간'이 삶의 본질적 조건이라는 메시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토회는 자살예방이나 정신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만든 단체가 아니다. 불교의 교리나 종교적 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들의 핵심 활동은 단순하다. 마음을 나누고, 마음의 작용을 이해하는 것. 그러나 이 단순한 행위가 사람들의 정서를 회복시키고, 삶에 대한 의지를 강화하며, 나아가 나와 타인에 대한 시선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정토회의 활동은 ‘이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이해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서 시작한다.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를 보고 나를 바꾸어라. 그러면 내가 행복해진다.
이 메시지는 ‘남을 탓하는 대신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라’는 권유이며, 그로 인한 변화가 감정의 회복과 삶의 회복력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단계를 거친다.
1. 자기 이해 –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2. 시선의 차이 인식 –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3. 타인 이해 – 이 인식을 바탕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그 역시 고유한 감정의 세계를 지녔음을 받아들인다.
4. 마음 나누기 – 서로의 감정을 판단이나 조언 없이 경청한다.
5. 내적 비난 완화 – 자기 비난, 시기, 원망이 약해지고 수용과 이해가 자란다.
6. 인식의 확장 – 결국 모두가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고, 각자의 주체성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삶과 감정의 주체임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파괴하려는 충동에서 멀어진다. 정토회가 말하는 ‘행복’은 바로 이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거창한 열정이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해치지 않는 상태, 즉 안정된 자기 수용이다.
정토회의 설립자 법륜은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구조 설계자’에 가깝다. 그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감정을 교환하고 성찰할 수 있는 수행 시스템을 체계화했고, 이를 통해 개인의 변화를 촉진했다. 그리고 이 구조는 단지 개인의 심리적 회복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적 모델을 제시한다.
정토회의 의미와 시스템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울증, 자살 충동과 같은 정신적 문제는 '죽지 마라'와 같은 직접적인 경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을 더 잘 살도록 돕는 환경이 마련되면, 자살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힘을 잃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정토회는 자살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삶을 느끼고, 서로 나누고,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강요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진 이 장 안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과 삶과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이것이야말로 강력하면서도 비의도적인 자살 예방 모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