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흐르는 사회 1
자살론 5편 6장
자
인간의 감정은 강물처럼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의 관계로 연결된다. 강물이 흐르기 위해 물길이 필요하듯, 감정이 순환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연결된 통로가 필요하다. 그 통로가 막히면 감정은 고여서 썩거나, 말라버린다.
현대 사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연결 수단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관계일 뿐, 실질적인 정서 교류는 오히려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SNS에서 '친구'는 계속 증가하지만, 막상 내면의 마음과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화 상대는 사라진다. 그렇게 현대인은 다수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면은 정서적 사막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이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흐르지 못한 감정이 내부에서 압력을 높이는 상태다.
감정이 흐를 수 없는 사회에서는 고통조차 머물 수 없다. 고통은 관계 속에서 의미화되고, 의미를 통해 변형되거나 사라진다. 그러나 의미화의 통로가 막히면, 고통은 변하지 못한 채 응고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본질적으로 감정을 환영하지 않는다. 감정은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이며, 무엇보다 예측이 어렵다. 그러나 시장과 기업은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 위에서만 작동하기를 원한다. 이 불일치 때문에 자본주의는 감정을 ‘인간 고유의 자산’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리스크’로 간주한다.
학교는 성적으로 줄을 세운다. 시험 점수와 진학률은 쉽게 수치화되지만,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이나 감정 표현 능력은 평가 지표에 없다. 직장은 실적이 최선의 목표이기에 그것에 도달하는 동안 느낀 불안이나 좌절은 보고되지 않는다. 기업이 요구하는 ‘정서적 안정성’은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아니라, 분노, 좌절, 슬픔 등의 ‘불편한 감정’을 억제하는 능력에 가깝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기능과 생산성을 우선시하는 시스템 속에서, 감정은 점점 더 효용과 비용으로만 인식되어 통제되고 억압된다.
이렇게 감정이 지속적으로 억압되는 환경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만성적 분비를 촉진한다. 장기간의 코르티솔 과다 상태는 우울증, 불안장애, 번아웃 등으로 불리는 감정 상태로 이어질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 이와 함께, 감정을 표출할 수 없을 때의 뇌는 그 상태를 위험 신호로 해석하고, 신체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생리적 긴장을 유지한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긴장은 ‘감정을 꺼내면 위험하다’는 학습을 강화하고, 결국 감정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정서적 무감각 상태'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는 이 악순환을 가속한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비교를 낳고, 비교는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이 구조에서는 승자조차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의 승자는 내일의 패자로 뒤바뀔 수 있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다. 패자는 말할 것도 없다. 패배를 부분적 능력 부족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결함으로 해석하며, 자존감이 급격히 추락한다.
결국 승자와 패자 모두, 감정의 극심한 요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요동치고 있는 감정을 흘려보낼 수 없는 사회에서, 인간은 점차 지치고 굳어간다. 그리고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도 함께 경직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자살이 단지 ‘삶을 끝내려는 의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누적된 끝에, 존재의 유일한 출구로 선택된 것이다. 감정이 흐를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면, 그것은 내면에서 고여 부패한다. 부패한 감정은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변하고, 그 공격성은 결국 자기 생명을 끊는 형태로 폭발한다.
이 모든 것은 감정을 잉여로 취급하고, 관계의 본질을 도구화한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비극적 현상이다. 자본주의는 타인을 협력자, 동료, 친구가 아니라 적이나 파트너로, 나아가서 '그것'으로 인식하게 했다. 따라서 효율과 성과 중심의 경쟁사회에서 관계의 윤리를 회복하는 것이 자살률을 낮추는 근본 조건이다.
감정이 흐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환대받는 관계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이 회복될 때, 감정은 다시 의미를 얻고, 존재는 다시 살만한 세상 속에서 삶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이 막히지 않고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의 일부를, 특정 문화와 공동체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고지대의 작은 지역, 라다크에서 그 단서를 발견했다. 그녀는 저서 [오래된 미래]에서 인도 북부 히말라야 고지대에 위치한 라다크(Ladakh)를 연구하며, 이 지역에서는 ‘우울증’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그녀가 관찰한 라다크 사회는 단순히 ‘행복한 마을’이 아니라,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순환하는 구조를 갖춘 공동체였다.
라다크인들은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는다. 개인의 삶은 공동체의 삶과 깊게 얽혀 있으며, 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은 곧 공동의 기쁨과 슬픔이 된다. 누군가가 병이 들면 치료는 가족을 넘어 마을 전체의 일이 된다. 집을 짓거나 수확을 할 때는 노동이 화폐로 교환되지 않고, 시간과 힘을 서로 빌려주며 상호적으로 순환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들은 서로를 분리된 개체로 보지 않는다. 때문에 ‘내 것’과 ‘네 것’의 선을 뚜렷하게 나누지 않는다. 고통은 분산돼서 흐르고, 기쁨은 함께 즐긴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는 감정이 병리로 전환되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하면 들어줄 사람이 있고,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 반응이 단지 개인의 성격이나 호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 안에 ‘기본값’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라다크 사회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비교와 경쟁의 압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과 생계의 기반이 시장 경쟁보다 공동체 협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부재하면,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이나 수치심이 크게 줄어든다. 이는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막고, 자기파괴적 감정의 누적을 방지한다.
라다크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감정이 병리로 전환되지 않으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 장치, 그리고 그 표현을 공동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필요하다. 라다크인들이 경험하는 행복은 ‘아무 문제가 없는 현실 상황’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감정을 나누고 흘려보낼 수 있는 통로가 항상 열려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런 확신은 자살 충동을 사전에 차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치다. 감정이 강물처럼 흐를 수 있도록 물길을 열어두는 사회만이, 구성원의 내면이 메말라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과거 한국의 공동체에도 존재했다.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