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빛은 어둠이 된다
자살론 5편 5장
감정은 빛의 스펙트럼이다.
빛이 펼쳐질 때 모든 색이 드러나는 것처럼,
감정 또한 숨김없이 드러날 때 인간다움의 가장 선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는 감정을 병리로 규정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사회의 건강을 진단하고 서로의 감정을 품어 스펙트럼을 넓혀가야 한다.
울음이 잦아들고, 웃음이 공허하며, 표현이 억압된 사회는 빛을 가둔 암흑상자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상자를 열어야 한다.
감정의 모든 색이 발산될 때,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게 드러난다.
현대 사회는 ‘느끼는 능력’보다 ‘견디는 능력’을 미덕으로 삼는다. 기업, 정치, 경제 시스템은 감정을 절제하고 표현하지 않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때문에 기준 이상의 감정의 표출은 통제 불능과 미성숙, 그리고 비효율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특히 성과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감정을 하나의 '정서적 비용'으로 취급한다. 회의 중 감정이 격해지는 사람보다 침착하게 보고를 밀어붙이는 사람이 신뢰받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슬픔, 수치심, 고통 같은 감정은 개인의 약점으로 치부하며,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타인 앞에서 드러내는 행위는 '프로답지 못한 행동'으로 훈계한다.
'예민하다'는 말은 이제 의학적 진단보다 더 무서운 낙인이 되었다. '쟤는 예민해'라는 말은 대화를 차단하게 하고, 감정의 타당성을 무력화시키며, 한 개인을 과잉반응의 상징으로 퇴행시킨다. 결과적으로 감정은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효율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한다.
정신의학은 분명 많은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구제하는 유익한 학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감정을 '표준화'하려는 조용한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 DSM-5(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는 인간의 풍부한 감정적 다양성을 '기분 장애, 불안 장애, 성격 장애'와 같은 분류 체계 안에 가두고, 이 테두리 밖에 있는 감정들을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우울, 불안, 분노, 공포, 고통과 같은 감정적 동요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조절 실패'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때로 외부 세계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한 반응일 수 있다.
부당한 현실 앞에서 느끼는 분노와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깊은 상실감에 대한 슬픔과 같은 감정들은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학은 이러한 감정을 마치 기계의 오작동처럼 '병리'로 번역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자주 바뀌는 기분은 '기분 장애'로, 자신감 부족은 '불안 장애'로, 타인에게 쉽게 상처받는 민감성은 '경계선 인격장애'의 증상으로 분류한다. 이러한 감정에 대한 번역은 복잡한 개인의 삶과 세계의 관계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언어적 기만이기도 하다. 정작 문제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억압하고, 이해하지 않고, 때론 무시하는 사회적 구조에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질문의 방향과 시선을 감정을 느끼는 개인을 넘어, 감정을 촉발시킨 환경과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해야 한다. 감정의 '비정상성'을 논하기 전에, 그 감정이 싹튼 사회적 토양이 과연 '정상'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원래 ‘정상(normal)’이라는 단어는 통계적 평균을 의미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평균을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변조했다. 그 결과,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사회적 반응이 예측 가능하며, 위계에 잘 적응하고, 감정을 적당히 드러내는 사람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상성은 더는 단순한 통계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규범이 되었다. 표준화된 정서 반응과 예측 가능한 말 그리고 절제된 표정과 감정의 강도를 조절하는 능력이 좋은 성격으로 평가된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러한 규범을 내면화하며, 사회가 정해준 정상의 감정 템포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다.
때문에, 감정이 빠르게 반응하거나, 어떤 사건에 과하게 몰입하거나, 작은 비판에도 깊은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평가를 넘어 ‘문제 있다’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때로는 이러한 낙인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다양하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은 반의어가 아니다. 인간의 감정은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다. 그것은 빛의 스펙트럼처럼 수없이 다양한 색채를 지닌 연속적인 현상이다. 모든 감정 반응은 세상을 다르게 느끼고 경험하는 감각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표준이라는 잣대로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감각을 재단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민감한 사람은 세상을 더 깊이 느끼고 더 섬세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러한 능력을 재능이 아닌 장애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직장, 학교, 그리고 개인적 관계 속에서 민감한 사람들은 '과잉 반응자'로 취급받고, 그들의 감정 표현은 '예민하다'는 조롱으로 되돌아온다.
수치심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때의 수치심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는 깊은 감각이다. 회의 중 던져지는 눈치, 수업 중 한 학생에게 쏠리는 비난의 시선, 대화가 오간 뒤 던져지는, '그 정도 일로 왜 그래'와 같은 수군거림 등은 단계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온다.
때문에, 민감한 사람은 이러한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감정적 반응이 '틀린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수치심은 외부의 비난이 내면으로 스며들어, 마치 스스로가 잘못된 존재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내면의 기제로 작동한다.
이제 그들은 외부의 시선이 만들어낸 수치심을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결함'으로 믿게 된다. 이로 인해 민감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이는 깊은 자기혐오로 진행한다.
결국, 민감한 자아는 사회의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의 존엄성을 훼손당하고 의심하는 기괴한 모욕의 구조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할까/
이 의문은 감정이 민감한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그들은 타인의 무시나 부당함보다 자신의 감정적 과잉을 먼저 의심하고, 타인의 공격적인 말보다 자신의 과도한 반응을 먼저 문제 삼는다. 자기 검열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러한 자기 검열은 자신의 감정을 사회의 '정상' 기준에 맞추려는 고통스러운 작업이 된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왜곡되며, 자아는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적 감정에 맞춰 스스로를 잘라내기 시작한다. 마치 가시 돋친 나무의 가시들을 깎아내는 것처럼, 자신의 본연적인 감각을 훼손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는 처참하다.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끝에는 자기혐오, 자기 의심,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자리 잡는다.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믿지 못하고, 그 감정 자체를 존재의 결함으로 여기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자기혐오의 감정 회로는 결국 우울증과 불안 장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는 단순히 감정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감정을 억압하고, 표현을 막았을 때 발생하는 감정의 소화 불량에 가깝다. 때문에 감정 회로의 끝에 도달했을 때, 그들이 느끼는 자살 충동은 '죽고 싶어'라는 욕구가 아니라 '내 감정을 더 이상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에 일어난다. 감정을 표현하려 해도 이해받지 못하고, 스스로마저 자신의 감정을 비난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결국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서비스직, 돌봄직, 창구직, 간병인과 같은 감정 노동자들은 모두 감정을 상품처럼 다루도록 요구받는다. '항상 친절하고 미소 지을 것, 감정을 드러내지 말 것'과 같은 지침은 계약서에 명시되지는 않지만 무형의 의무로 강요된다.
이러한 감정노동은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프거나 괴로울 때도 웃어야 하고, 분노 속에서도 공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되면 '감정의 이중 분열'이 일어난다. 속으로는 찢겨도 겉으로는 평온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은 개인의 내면과 외면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그 결과,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고 지우며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지속적인 감정 억압은 정서적 피로로 차곡차곡 축적되다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감정의 파동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사회는 그를 '조절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런 낙인은 결코 개인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사회가 감정을 억누르도록 설계해 온 구조적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살아가면서 감정을 숨기는 법은 배우지만,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이는 감정 억압이 마치 유전자처럼 사회 제도를 통해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학교는 '참을성'을 덕목으로 가르치고, 군대는 '인내'를 훈장으로 삼는다. 게다가 가정에서는 '울지 마라'를 반복해서 듣는다. 이렇게 감정 억압은 유전자가 되어 사회를 흐른다.
이 유전자는 감정은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다. 분노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며, 슬픔은 '사적인 영역'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규범은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그 결과, 사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감정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 부르고, 둔감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생활양식을 만든다. 그렇게 둔감함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사회가 길러낸 문화적 유전자가 된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음 세대의 감각으로 흘러간다.
감정은 빛의 스펙트럼이다. 빛이 펼쳐질 때 모든 색이 드러나는 것처럼, 감정 또한 숨김없이 드러날 때 인간다움의 가장 선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회는 감정을 병리로 규정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사회의 건강을 진단하고 서로의 감정을 품어 스펙트럼을 넓혀가야 한다.
울음이 잦아들고, 웃음이 공허하며, 표현이 억압된 사회는 빛을 가둔 암흑상자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상자를 열어야 한다. 감정의 모든 색이 발산될 때,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게 드러난다.
그 시작은 언어다.
“예민하다, 과민하다, 멘탈이 약하다”는 낙인의 말 대신,
“감각이 풍부하다, 반응이 섬세하다, 정서가 살아 있다”는 긍정과 포용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이 언어의 전환은 민감성을 결함이 아닌 사회의 자산으로 인정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어서 공동체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학교, 직장, 병원 등의 상담 체계는 평균적이고 강한 다수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는 평균과 함께, 다양한 '변이'를 포용하는 시스템을 갖출 때 가능해진다. 민감한 존재들이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제도가 늘어날수록, 사회 전체의 정서적 면역력은 높아질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회는 '적응하지 못한 자가 문제'라는 명제를 해체해야 한다. '적응'이란 종종 거짓을 견디는 훈련이었고, 자기를 지워야만 하는 생존 전략이었으며, 자신이 아닌 존재로 살아남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자야말로 자신의 진실함과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민감함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다. 그러나 그 인간다움은 종종 모욕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살은 그 모욕이 오랫동안 쌓여 발생한 감정적 함몰이며, 때로는 존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기도 하다.
빛은 아름답다. 아니 빛은 펼쳐져야 아름답다. 감정은 인간이다. 그러나 감정은 펼치고 나누고 수용할 때 아름답다. 빛이 모든 색을 품고 있듯이, 현대의 사회도 각자의 감정을 모두 품어 빛처럼 발산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빛을 펼쳐 무지개를 만들듯, 감정을 펼쳐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더 살 만한 세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