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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장이 휴 Nov 10. 2024

직장인이 회사에서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 이 글은 '대장간'에 수록한 글을 일부 수정하여 발행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글의 원문이 궁금하시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사회화


모든 인간은 연기를 한다.

그게 사회가 원하는거니까.


사회는 그래서

'교육'이라는 제도적 통과의례를

만들었다.

사회의 일원인 구성원들을

진정한 일원이 되게 하는 것.

그걸 세상은 '사회화'라고 불렀다.


사회는 흡족했다.

내 이름을 따서 '사회화'라니.

그럴싸하지 않나.

당신의 이름이 철수인데,

세상 사람들이 다들

'철수화'를 거친 후 뿌듯해한다면

당신도 분명 흡족해하리라.


문제


문제는 각 인간이 지니는

개성과 예술성이었다.

그냥 매드맥스에 나오는

회색빛의 펩시맨들처럼

전부 다 똑같으면 딱인데.

그게 사회화의 이상형인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질 않았다.

그들은 진짜 자신이길 바랐다.

성공적인 '사회화'를 마친

인간들조차,

30년을 구른 후에는

어느 순간엔가

후회하고

눈물짓고

분노하고

폭발했다.


아, 딱 영화 매드맥스에 나오는

그 회색 펩시맨들처럼만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죽을 때나 그냥 아쉬움에

'기억할께.' 이러고 가면 되는데.

사회는 아마 이런식으로

신세를 한탄했겠지.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평생 만족스럽게

사회화된 채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그 시기가 20대든, 40대든, 60대든

어느 순간엔가

너무 오래 부여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온 것에 깊은 회한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고통은 늘 후자의 몫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빨간약을

가까스로 삶의 어느 국면에서 찾아낸

후자의 사람들은

극도의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겪었다.


전자는,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기뻤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연기


차이는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온당한 것'을

연기하느냐 아니냐'

에서 비롯되었다.


전자는 연기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팀장이 남아있으면 나도 남고,

주말에 부르면 등산을 하고

회식 가면 숙취해소제 먹으며 술상무하고,

힘들고 슬퍼도 앞에선 광대처럼 웃고,

그게 훌륭한 사회일원, 조직구성원으로서

온당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진짜 인간의 올바른 처사가 그런거니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겉과 다르게 저 자는 날 위하지 않는다.

인간은 연약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것들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보려는 자들을

거칠고 교묘하게 찌르고 학대해야했다.

그래야만 내가 붕괴되는 위험을 막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덕에

인간은 원시사회를 한참 지나고도

지금까지도 다같이 큰 무리를 지어 살아야만 한다고

세뇌된 채 살아왔다.

(코로나가 여기에 균열을 만든 거 같긴 하지만.)


그래서 후자인 사람들은 '연기'를 해야했다.

사회화가 뼛속 깊이 잘 된 사람인 양.

사회가 제시하는 가장 올바르고 모범적인 삶을

나도 진심으로 살고 싶은 양.

내 생각도 당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양.

그렇게 웃고 끄덕이고 입을 닫고 순종하며,

연기를 했다.


배우 '허성태'가 언젠가 TV방송에서

게릴라토크콘서트처럼 이야기하는 걸

유튜브에서 몬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자신은 배우일 때보다

직장을 다닐 때 더 연기를 많이 하며 살았던 것 같다고.


그는 후자였지만 좋은 직원이어야 했던거다.

배우인 지금보다 더 연기를 많이 해야할만큼.

과연 이게 그만의 문제일까.


현실


나는 직장생활을 오래도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 크게 후회하진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을 실로 꿰는 것은 나의 몫이고,

나는 노예처럼 '사무실 자리'라는 감옥에 갇혀

꾸역꾸역 참고 버티던 시절을

그저 불행이라는 이름의 허비로 쳐박을 생각이 없다.

나는 그 시절을, 내 자양분으로 삼으며 산다.


나는 월급을 얻어

밥도 먹고 옷도 사고 병원도 가는

직장인의 삶을 겪은 덕분에,

상담심리대학원에서 그저 책으로 읽는 것들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진짜 현실을

피부로 오랜시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된 친절을 두르고 산다.

과도하게 친절하고 다소곳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분노와 적대감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나와 피부를 맞대고 지내는 누군가가

꾸역꾸역 어디가 고장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그렇게 연기를 하며 사는 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보다보면,

왜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게 지쳐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속에 있지도 않은 미소와 친절과 배려를 베푼다.

보고 있으면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고 완벽하게 연기하며 산다.

그러다가 간혹 진심을 내보이는 걸 볼 때면,

그가 얼마나 속으로 분노하고 혐오하고 격분하는지

깨닫게 된다.

저렇게 불평, 불만, 시기, 분노가 많은데

저렇게 하루종일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 수 있다니.

혀를 내두르게 된다.


피로


결국 그렇게

피로감은,

인간의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결국 그렇게 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모든 시간들은,

내면에 울분과 환멸이 쌓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피로감은 사라지지 않은 채

켜켜이 쌓여서

언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유없는 수많은 감정과 기분들에 대해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우리가 이유를 모를 뿐

이유가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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