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캠코더

Episode 2.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나의 어린 시절

by 숲속의우주


"OO아, 여기 봐야지~ 까꿍!"


초등학교 입학 후 고학년에 접어들던 시기. 어느 날, 아버지는 온 가족을 거실에 불러 모아 텔레비전에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재생시켰다. 어떤 여자 아기가 돌상 앞에 색동저고리의 한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바로 나였다. 옛날에는 친척 식구들을 초대해 자택에서 돌잔치를 했던 모양이다. 익숙한 안방 벽지가 보였다. 집에서 차린 돌상이었지만 어찌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팥시루떡, 꿀떡, 각종 과일들이 5층 석탑 높이만큼 수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방긋방긋 웃지 않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울음을 멈출 줄 몰랐다. 어른들은 속이 타는지 나를 달래기 위해서 손바닥을 치며 박수소리를 내는 등 웃음 짓게 하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었다. 머리에 쓰여 있는 검은색 복건을 벗고 싶었는지 머리 위로 손을 올려서 복건을 잡아당겼고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졌다.


마침내 복건을 벗고 평온해진 나는 돌잡이 물건 중에 하나를 골라 잡았다. 책, 연필, 돈, 청진기 등 많고 많은 물건들 중에서도 내 신경은 온통 '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쌀 그릇 안에 손을 넣어 조물딱 거리면서 쌀을 손으로 쥐었다가 폈다가 하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손목까지 깊숙이 넣었다가 확 빼 올리면서 쌀을 사방에 흩어 뿌리기도 했다. 비디오 속의 어른들은 너도나도 "태어나서도 잘 먹더니, 먹을 복이 많은 애네."라며 웃어 말했다.


아빠 : "저거 봐! 저게 너 돌잔치 때 모습이야. 언제 이렇게 커서는."

나 : "아 진짜... 아빠는 창피하게 이걸 왜 틀어! 빨리 꺼!"

엄마 : "애가 싫다는데 당신 혼자 방에 들어가서 보지. 주책맞아!"

동생 : "저게 누나야? 크하하! 근데 나는 아직 안 태어난 건가? 내 거는?"


나의 강력한 저항으로 우리 가족은 비디오를 끝까지 보지 않은 채 TV를 껐다. 당시에는 기억나지 않는 갓난아기 때의 무의식적이고 또 본능에 충실한 나의 모습을 보는 게 부끄러웠다. 더구나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독립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어린이였다.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생의 아기 때 모습이 담긴 비디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비디오를 보면서 더 좋아라 했더라면, 동생이 서운해하지 않았을까? 내 속도 모르고 아버지는 고마워하지 않는 나를 보고 서운해했다.


비디오가 사라진 이유를 어머니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고장 난 캠코더를 수리점에 맡겼는데, 녹화 중이던 동생의 비디오테이프가 그 안에 들어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고. 수리기사는 캠코더를 정상적으로 녹화될 수 있도록 제 기능을 돌려놓았지만, 비디오테이프는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지 못했다. 수리점 안에는 똑같이 생긴 비디오테이프들이 즐비했을 것이고, 더구나 아무런 제목도 써두지 않았다면 누가 주인인지 찾을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비디오를 다시 재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동생의 비디오테이프처럼 허탈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내 것만은 고이 보관해 두었다. 비디오테이프 시장이 축소되고, CD플레이어의 세상이 올 때 즈음, 아버지는 트렌드에 맞춰 영상물 저장매체의 형태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비디오테이프는 주황빛 투명 케이스에 담은 CD로 바뀌어,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수차례 방황하고 우울해진 적이 많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줄 알았는데, 나 자신을 비롯해서 세상에는 넘어야 할 산들은 셀 수도 없었다. 방 안에 틀어 박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던 날, 나는 아버지가 촬영해 주신 어린 시절 CD를 꺼내어 보았다. 영상을 이어서 다시 보니, 돌잔치 때 울보였던 나는 사실 낯가림도 없고, 흥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고, 우애가 깊은 아이처럼 보였다.


할머니와 고모가 우리 집에 놀러 온 날, 나는 가수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실룩샐룩하며 재롱을 부렸다. 화창한 낮이면, 거실에 있는 스프링 흔들 목마에 올라타서, 말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싸움이라도 하듯이 아주 힘차게 말을 탔다. 고요한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작은방 문틀에 걸어둔 그네에 나를 태웠고, 흔들거림을 느끼면서 곤히 잠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동생도 잠깐 등장했는데, 나는 동생을 보호하려는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영상을 보면서 복잡 미묘한 감정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몇 번이고 훔쳤다. 주름기 하나 없는 앳된 부모님의 얼굴, 아기 때만 지어 보일 수 있는 순수하고 무해한 웃음,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저 함께여서 기쁘고 행복한 일상.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아니면 익숙해서 무뎌졌던, 부모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온전히 느껴서였을까? 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다그치고, 때론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던 일에 대해서 재고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찍어주신 어린 시절 영상이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다른 어떤 사진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keyword
목, 일 연재
이전 01화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