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가을 소나기가 내리던 날, 동생과 논두렁에 빠지다
"뒷마당에 자전거 어디 갔어요?"
"미나니(민환이)가 타고 나갔지."
"에? 오늘 우리가 그거 타고 놀라고 했는데..."
"큰 쌀자전거 말이냐? 느그들은 못 타여."
"탈 수 있어요! 이젠 발이 닿는다구요!"
이쯤 되면 추억이 많은 시골 할머니댁이 어떤 생김새인지 소개할 때가 되었다.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 작은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이곳. 차량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에 위치했어도 꽤나 마당이 큰 집이었다. 한때 시골 면장을 지내신 할아버지를 만나 보기 위해 시골집에는 마을 어른들의 왕래가 잦았다. 안부 인사는 덤이고, 이소리 마을에서 벌어진 대소사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옆집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낳은 소식부터 가까운 공장에선 호박엿이 성행하는 소식까지. 도시에서 들어볼 수 없는 정겨운 소식들이 마냥 듣기 좋았다.
아버지 삼 남매가 나고 자랄 때 사진을 보면, 옛날 시골집은 초가집 형태를 띠었다. 정확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초가집을 '네모난 모양의 2 층형 빨간 벽돌 주택'으로 개조했다. 붉은색 벽돌 주택을 지키는 파란색 대문 위에는 아치모양 장식이 있었다. 여름이 되면 장미가 자기 덩굴로 몸을 휘감아 손님들을 환하게 맞이했고, 눈이 쌓이거나 고드름이 거꾸로 매달려 겨울로 바뀐 계절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나면 골목길에 가로등이 몇 개 없어서 대문이 마치 유령의 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겁이 많은 나는 밤에 혼자 마당으로 나가기를 꺼렸다.
대문 왼편에는 큰 감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타고 오르며 놀던 오래된 나무라고 했다. 그 나무 밑에는 한때 대문을 지키던 백구가 한 마리 살았다. 떠돌이였던 백구가 몸집이 커지고 밥을 너무 많이 먹게 되자, 할아버지는 백구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냈다. 어른들에게 내색한 적은 없지만, 나는 비어있는 개 집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아쉬움과 깊은 허전함을 느꼈다. 대문 오른편의 작은 텃밭에는 배추나 대파 등 간단한 농작물이 심겨 있었고, 야외 수돗가에 호스를 연결하여 작물들에 풍족하게 물을 뿌려줄 수 있었다. 덕분에 텃밭 옆의 화단에 심긴 봉숭아 등 알록달록한 꽃들도 잘 피어났다.
시골집의 주택 현관문은 대문과 앞마당을 지나 돌계단을 8단 정도 올라야지만 그 입구를 열 수 있었다. 높은 지반 위에다가 마룻바닥을 깔고 주거공간을 꾸며 놓은 것은 옆집들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이었다. 홍수나 폭설 등 자연재해로부터 주거공간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면 주택 설계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주택의 지붕을 기와나 패널로 된 삼각형으로 마감하지 않은 점에서도 다른 집과 형태가 달랐다. 주거공간의 천정 위를 콘크리트로 판판하게 메운 덕에 옥상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주택 현관문의 반대편으로 뒷마당 초입에 위치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무심코 밟을 수 있는 붉은 고추나 늙은 호박씨, 나물 등은 옥상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뒷마당에는 할머니가 직접 담그시는 고추장, 된장, 김치가 숙성되고 있는 크고 작은 장독대들이 즐비했다. 봄에는 구렁이, 여름에는 개구리나 달팽이, 가을에는 두꺼비가 장독대 뒤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따금씩 자신의 존재를 뽐내듯이 울음소리를 냈다.
특히 아버지는 이런저런 고민이 많을 때면 시골집 옥상으로 올라가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담배를 태웠는지,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는지, 맨몸 운동을 했는지 아버지의 행적을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 뒤 옥상에서 내려오는 표정이 이전과 달랐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마치 복권 당첨번호를 점지받은 사람처럼 희망이 가득했다. 옥상에서는 집마당에서 들리는 가족들의 이야기 소리와 멀리 보이는 고향 마을의 풍경으로 잔잔하면서도 포근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시골집 옥상은 유명한 병원보다도 더 나은 치유의 공간이었지도.
이러한 시골집에서도 나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 것은 따로 있었다. 뒷마당에 항상 세워져 있는 할아버지의 커다란 '쌀자전거'였다. 언제든지 내가 혼자 탈 수 있는 자전거였다면 탐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키가 150cm가 넘지 않는 초등학생에게 바퀴와 핸들이 큰 자전거는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자전거가 한대 밖에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자전거 뒤에 물건 대신 어린이 한 명을 태우려면 운전수는 꼭 아버지나 삼촌 같이 힘 좋은 성인 남성이어야 했다. 마을 구경 겸 가까운 읍내 슈퍼마켓에 갔다 오려고 하면 최소 15분이 소요됐다. 나 말고도 자전거 타기를 기대하는 사촌들이 다섯 명이나 더 있으니까, 1시간 뒤에 내 차례가 온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나 삼촌이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자전거를 태워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빨리 키가 커서 혼자 쌀자전거를 운전할 수 있는 때가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어른들에게 조를 필요 없이 시골집 돌계단을 정류장 삼아 동생들을 번갈아 가며 태우고 우리만의 세상으로 나아갈 날이 오기를. 마침내 중학생이 된 나는 제법 쌀자전거 타기에 자신감이 붙었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선보인 삼촌처럼 한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가능했다.
"아빠, 언제 들어와?"
"OO이네 왔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지금 당장 자전거가 필요해. 할아버지가 심부름시키셨어."
"알았어. 지금 들어가~"
자전거 타기를 벼르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애매한 거리에 있는 친구의 비닐하우스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평소 우리를 태울 때를 빼고는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적이 없어서, 왠지 할아버지 핑계를 대면 자전거를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는 하염없이 다정했지만, 아버지 두 형제에게는 엄격했다. 할아버지 뜻을 거스른다면 아버지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내게 돌려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속임수가 있었지만, 나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경을 나갈 수 있음에 기뻤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도록 치밀하게 자전거 주행코스를 계획했다. 사촌 여동생을 뒤에 태우고 할아버지의 포도밭 방향으로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았다. 포도밭으로 가는 길은 차가 다니지 않는 길쭉하게 난 포장도로여서 자전거를 타기가 좋았다. 게다가 도로 양 옆이 죄다 논과 밭이라 익어가는 곡식 풍경을 보며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길의 중간에는 하천이 흐르고 그 위로는 돌다리가 있어서, 자전거를 재정비하고 동생을 내렸다 다시 태워 집으로 돌아오기에 완벽했다.
자전거가 한두 번은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긴 했지만 앞으로 직진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눈을 찌르는 통에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전환점인 돌다리에 도달하기 전, 길의 한가운데서 유턴을 시도했다. 왼쪽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는데, 뒤에 동생을 태워서인지 생각보다 회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자전거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호박덩굴이 있는 논두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자전거에 깔린 나는 오른쪽 팔꿈치와 무릎이 다 까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양다리를 한쪽 방향으로 걸터앉아 있었던 여동생은 논두렁을 두 발로 잘 지탱할 수 있어서 찰과상을 입지 않았다. 만약 동생이 머리나 허리가 먼저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세찬 비는 계속 내리고, 호박들은 와장창 깨지고, 놀라서인지 나는 내 몸인데도 어디가 어떻게 얼마만큼 아픈지 느끼지 못했다. 동생과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자전거를 길 위로 끌어올렸다. 내가 혼자 자전거를 끌고 가면 된다는 생각에 동생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으윽.. OO아, 괜찮아?"
"나는 안 다쳤어. 근데 언니 무릎이! 피가 엄청 많이 나."
"괜찮아. 자전거는 내가 끌고 갈게. 비 오니까 너라도 먼저 집까지 뛰어가."
동생의 눈에서 흐르는 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비에 쫄딱 맞아 옷이 다 젖으면서도 자전거 사고를 낸 나를 원망하지 않은 동생이 되려 어른스러웠다. 동생은 나를 더 걱정하면서 어른들께 사고 소식을 알리러 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친 팔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자전거에 지탱하며 열심히 걸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시골집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우습게도 비가 그쳤다. 그리고 나에게 보란 듯이 일곱 빛깔 무지개가 떴다.
"뭐?! △△이는? 크게 다쳤어?"
"어머머... 자전거 탄다고 할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계집애가 무릎이 성할 날이 없네. 쯧쯧, 가만히 있질 못해."
대문을 들어서니 웅성거리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렸다. 다친 건 다친 것이고, 위험하게 자전거를 타다 사고가 난 데 자책하던 나는 크게 혼이 날까 불안했다. 동공이 흔들리던 중 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버지는 나에게 단 한마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나를 등에 업고 돌계단 위를 올랐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는 이런 것일까?
집 안으로 들어오자 젖은 옷이 마르는 듯했다. 그리고 거실에는 미리 구급상자가 꺼내져 있었다. 아버지는 '빨간 약'으로 불리는 포비돈요오드 용액으로 내 상처를 소독해 주었다. 어느새 놀란 가슴이 진정되는 듯했다.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에 어떤 말부터 꺼내야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내가 저 쌀자전거를 타나 봐라. 또 타면 나는 인간도 아니야.'
이제와서 자전거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보니, ‘결과가 나빴다고 해서 그 과정까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우선 아버지의 고향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곳에서의 특별한 경험에 나는 얼마만큼 진심이었는가. 어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방식으로 시골 마을을 탐구하려고 했던 시도는 역설적이게도 멋지다. 무엇보다 딸의 안전을 확인한 뒤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을 아버지의 사랑이 새로 보인다. 자전거를 타기 전과 후의 시골 풍경은 이토록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