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시골 내려가는 길, 온 가족이 부르던 노래 '고향역'
옛날 우리 집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컴퓨터 책상이 보이도록 거실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책상 왼편에는 130센티미터만 한 높이의 CD 진열장이 있었다. 만 7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나의 키와 그 높이가 비슷했을 것이다. 내가 학교를 다녀와서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손이 닿는 곳은 CD 진열장이었다. 선반에는 칸마다 얇은 CD를 25장 정도 끼울 수 있었다. 여덟 칸으로 짜여 있었으니 총합이 족히 200장이나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 많은 CD들 중에서 초등학생 학습을 위한 교육용 자료는 채 5장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머지 전부는 아버지가 매월 인기 차트에 오르는 '가요 Top 20' 음원을 구해다가 공 CD에 구워 낸 자체 제작 앨범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주신 CD플레이어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등하굣길이나 학교 쉬는 시간, 방에서 과제하는 시간에 마음껏 내가 듣고 싶은 장소에서 음악을 향유했다. 무엇보다 매월 최신화되는 음악 CD는 내게 보다 성숙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불어넣어 주는 문화 예술 그 자체였다.
그 덕분에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부터 어른들이 즐겨 듣는 발라드, 팝송,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가요를 접할 수 있었다. 내 나이 때에는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휴대용의 작은 기계 'MP3'는 중학생이 되고서야 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신문물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사용하던 2G 핸드폰은 통화와 문자만 가능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뮤직어플을 통해서 음악을 무제한 재생할 수 없었다. 나도 '라테' 타령을 하는 걸 보니 "지금 세상이 참 좋아진 것"이라고 말하는 기성세대에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아버지는 우리 네 가족이 한 차를 타고 멀리 이동할 때 차에 틀어 놓을 음악에 대한 선택권도 나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그래서 시골 할머니 댁에 간다고 하면 내 가방 안에 준비물들을 챙기느라 나는 분주했다. 내가 원하는 곡만 쏙쏙 골라 넣어 같은 CD 안에서 트랙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음악 CD를 여러 장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을 듣고 신나게 어깨춤을 추다가도, 한 순간에 조성모의 '아시나요'를 들으면서 슬프고 우울한 감성에 취하고 싶은 법이니까!
서울에서 경상북도 상주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다. 고속도로가 뚫리지 않은 소도시여서 굽이굽이 산길의 국도를 따라 이동하면 장장 6시간 동안 차로 내달려야 했다. 그래서 나만이 가지는 DJ로서의 책임감으로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해서 여러 장르의 조합으로 음악 CD들을 골랐다. 아주 다행인 건, 나와 달리 남동생은 얌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만약 서로 리모컨을 가지겠다고 쉴 새 없이 다투는 남매였다면, 우리 가족은 음악은커녕 내내 '도로 교통 방송'만 듣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쌩쌩 옆줄에서 함께 달리던 차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작은 시골길에 들어서는 우리 차 안은 더욱 고요해졌다.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도로는 어린이의 넘치는 체력도 금세 바닥나게 만들고, 뒷좌석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던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물론 휴게소에서 들려 산 델리만쥬나 호두과자를 많이 먹은 뒤 식곤증이 온 것 일 수도 있다. 잠결에도 작은 볼륨의 음악 소리가 꽤나 선명하게 들렸다. 나훈아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내가 잠들고 아버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그제야 틀었던 것 같다. 낯익은 '고향역' 노래가 들리자마자, 나는 시골 할머니댁에 다 와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일평생 '나훈아 바라기'였다. 공 CD에 음원을 구워내지 않은, 아니 구워낼 수 없는 유일한 가수가 바로 나훈아였다. 그래서인지 나의 많은 음악 CD들과는 음질이 차원이 달랐다. 다른 라이벌 가수들과 비교할 때면 아버지는 나훈아의 작곡 및 작사 능력과 가창력을 추켜 세우며 "범접이 불가한 일등의 가황"이라고 말했다. 팬심이 깊은 아버지는 나훈아 콘서트가 열릴 때마다 언제 어디든지 공연을 찾아다녔다. 다른 집은 자녀들이 효도를 위해서 공연 좌석을 잡기 위해 혈안인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과도 티켓을 경쟁하면서 온라인상에서 마우스 클릭 하나하나 촉각을 다투는 와중에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원하는 공연 좌석을 척척 구해냈다.
그러면 한 번쯤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조용필이나 이문세 콘서트 티켓도 예매해서 공연을 보러 갈 법도 하지 않나?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늘 나훈아 공연만 보고 즐겼다. 아버지만큼이나 나훈아에 대한 팬심이 깊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은 나훈아 노래가 흘러나오면 외워둔 가사를 줄줄 읊으며 떼창을 할 수 있었다. 고향에 내려갈 때 더욱 깊이 나훈아 노래에 빠져 있던 아버지를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이해하게 될까? 내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독립한 자녀들이 그립고,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의 마음이 십분 이해하게 될 때가 돼서야 나는 아버지가 나훈아를 사랑하셨던 이유를 알게 될 것만 같다.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