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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Episode 1. 프롤로그

by 숲속의우주

1961년 태어난 아버지는 본관은 김해이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할 때 일정한 대수의 항렬자를 정해 놓아 아버지 세대는 'O환'을 돌림자로 쓴다. 아버지 성함의 뜻은 '하늘 민'과 '넓은 환', 두 개의 한자로 풀이할 수 있듯이 "하늘처럼 넓은 사람이 돼라"는 조상님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나에게 단 한 번의 잔소리 없이,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던 우리 아버지는 그 염원대로 내게 드넓은 하늘이었다.


아버지는 만 28세 나이에 어머니와 혼인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전통 혼례가 흔하지 않았다는데,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 앨범을 처음 본 나는 화들짝 놀랐다.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야외 전통혼례식을 열었는데 그 장면들이 이색적이었다. 아버지는 왕의 익선관과 곤룡포로 차림으로 말 위에서 손을 흔들면서 입장했고, 어머니는 궁중대례복인 적의를 입고 꽃가마를 타고 입장했다. 마을 전체의 잔치인 양 모두들 즐거워 보였고, 하객들의 규모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면 진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남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는 아버지만의 개성 있는 성격이 엿보였다.


화려한 결혼식 이후 바로 그다음 해 내가 태어났다. 부모님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어, 내 밑으로는 2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남매를 편애 없이 사랑하셨지만, 첫째 딸에 대한 애정은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내가 함께 추억하고 있는 사물과 장소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버지와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써 내려가고 싶었다. 내가 나이를 더 먹으면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더 희미해지지 않을까?


취미 부자였던 아버지는 시중에 혁신적인 전자물품이 나올 때마다 사가지고 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게 해 주셨다. 비디오 캠코더, 휴대용 워크맨, 디지털카메라, MP3, 닌텐도 게임기 등등. 아이가 고가의 물품을 가지고 다니다 잃어버릴까 아니면 조심성 없이 사용해서 고장 내지는 않을까? 나라면 조마조마한 마음에 선뜻 내어주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어떤 물건을 사달라고 부모님께 먼저 조르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오히려 나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지 않은 편이다. 무엇보다 사진을 찍어주고, 여행을 기록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도전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전국 단위로 여러 개의 지사가 있는 대기업에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언제 어디로 발령 날지 모르는 불안 요소를 없애고자 여러 차례 이직을 했다. 그 덕분에 우리 네 식구는 여름방학이 되면 수영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시골집으로 내려가 일주일 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풍족한 환경에서 좋은 육아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있었을까?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아버지는 회사를 옮기면서도 단 하루도 실직 상태의 공백기 없이 성실하게 근무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가졌다. 직장생활을 9년 차 밖에 되지 않은 나는 어떻게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나 걱정하면서, "이제는 쉬고 싶다!"는 말이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살아생전에 '한창 할 일 많은 농사철, 5월의 소'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하신 아버지가 대단하면서도, 어쩐지 아버지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든다. 늘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아버지께 자주 표현해드리지 못했다. 가장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따뜻한 위로로 가볍게 만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가장 죄송하다.


아버지는 결혼 5년 차인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남몰래 걱정하면서 손주가 생기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만 62세의 젊은 나이에 출근 준비를 하시다가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로 입원하였다. 내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시점도 그때 즈음이다. 초기 임산부는 면역력이 떨어져 있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태아의 상태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중환자실 면회가 제한되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나를 대신해서 아버지에게 딸(누나)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또 아버지의 의식이 있을 때마다 귀에 대고 아기 '반짝이'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고 하는데, 기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병이 치료되어 기력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적적으로 바랐지만, 아버지는 두 달 남짓한 투병생활을 끝으로 영면하였다.


장례식에 조문 오신 어른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하늘나라에 가서도 '반짝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로 지켜주실 것"이라고 위로했다. 친구들도 내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눈물을 닦고 씩씩하게 버티기를 응원했다. 아버지도 내가 힘들기를 바라지 않으실 테다. 그토록 기다리던 손주를 안아보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태어나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면 할아버지가 계신 산소에 자주 데려가야겠다고 다짐한다. 훗날에 우리 남편과 '반짝이'가 함께 놀고 어울리며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 많이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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