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런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의 삶은 두통이 시작된 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물론 몇 군데 더 포인트라고 할 만한 인생 전환점들이 있기는 한데,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을 굳이 양분하자면 그렇다.
대략 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느낌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종류의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두통이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였고, 진통제란 오로지 생리통을 위해 만들어진 약일 뿐, 그 외의 용도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나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두통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 엄마가 머리카락을 ‘쫌매줬을’ 때의 느낌. 잔머리 하나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쫌매서 두피가 팽팽해진 느낌. 표준어는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감각을 표현하기에 ‘쫌매다’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또 어느 날은 머릿속에 작은 애벌레가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애벌레는 굳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이곳저곳을 기어 다닌다. 어떤 날은 머리에 전류가 흐르기도 한다. 미세 전류가 흐르는 내 머리에 손을 대면 감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또 어느 날은 어린이용 헬멧을 머리에 뒤집어 쓴 느낌도 든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을 때와도 비슷하다. 그러기를 5년이다.
처음 1년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고, 그다음 1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씻은 듯이 낫고 싶었으며, 그리고 또 1년은 이만한 게 다행이지 싶었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난 지금은 나름대로 즐겁게 지내고 있다. 어쩌면 두통이 생기기 이전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가. 고비를 지나고 보니 두통도 하나의 감각일 뿐, 무섭기만 한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고 많은 감각 중에 하필 아픈 감각, 즉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필요 이상으로 겁을 낼 필요는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다양한 감각을 느낀다.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키보드, 엉덩이와 의자가 맞닿는 면, 팔꿈치를 단단히 받쳐주는 테이블, 머리에 꽂은 핀, 그리고 그 주변을 흐르는 미세 전류까지. (오늘은 미세 전류다.) 내 몸이 인식하는 여러 감각들 중의 하나로 두통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감각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날도 있고, 또렷하게 느끼는 날도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두통에 크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 무시할 줄도 알고 기다릴 줄도 알게 된다.
한때 ‘받아들임’ 혹은 ‘내려놓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랐다. 분명 ‘포기’와는 다른 말인 건 알겠는데, 어떻게 다른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두통의 관계에 대입해보니 이제야 대충 이해가 간다.
두통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나는 ‘아이를 닦달하는 엄마’였고 두통은 ‘엄마가 그럴수록 더 엇나가는 아이’였다. 엄마인 나는 회초리를 들고 아이를 협박하기도 하고, 억지로 온갖 종류의 약을 먹이기도 하고, 이 학원, 저 학원 끌고 다니기도 한다. 엄마의 바람대로 아이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화내고 방에 가두고 별짓을 다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는 절대로, 절대로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이런 엄마가 있다면 차라리 포기하시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랬다.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포기가 아니다. 아이의 기분과 몸 상태를 잘 살피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고, 아이가 진정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엄마가 아이를 포기했을 리 없다. 나는 나의 두통에게 그런 엄마이고 싶다. 그러면 나의 두통도 조금은 순해지지 않을까?
사실은 두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글을 쓰려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일었음을 고백한다. 그때의 아픔, 외로움, 공포를 굳이 되살려야 하나? 과거를 샅샅이 뒤져서 뭣에 쓰려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기에도 바쁜데 왜 나는 별로 좋지도 않은 과거사를 끄집어내려고 할까? 괜히 자극해서 두통이 더 심해지면 어쩌나. 가슴 속에서 그만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얻은 평화인데, 이 소중한 평화가 깨지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서 글을 쓰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부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삶은 고해라고. 사람들은 종류만 다를 뿐이지 각자의 아픔, 통증을 안고 산다. 부처님, 예수님이 나서야 했을 정도로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은 본래 힘들고 아픈 삶을 살아왔다. 그런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내 이야기를 남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혹시나 이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아파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그게 아니면 300년쯤 지나서, 두통이란 병이 사라진 미래의 어느 학자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지도? 최소한 내게는 의미 있는 행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