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도 연습이 필요하다면...
고마울 정도로 애써준 의사들도 많다.
매일 추리닝에 허름한 차림으로 병원에 다니니까 당신은 추리닝 안 입고 오는 날이 낫는 날일 거라고 농담한 의사도 있고, 원래 예쁜 사람들이 두통에 잘 걸린다며 날 웃겼던 의사도 있다. 그만큼 환자를 편하게 대했던 분들이다.
두통이 악화될까 봐 걱정하는 내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라고 부드럽게 말해준 의사도 생각난다. 지금도 유달리 아픈 날이면 그 말을 떠올리며 ‘그런 일은 없을 거랬어'라고 혼자 위안 삼곤 한다.
그러나 시간 낭비, 돈 낭비로 흘려보낸 병원 쇼핑도 더러 있다.
대학병원 의사 한 명은 증상을 설명하는 내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잘못된 용량의 약을 처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진료실을 찾았고, 약의 용량이 정확한지 묻자 그제야 당황한 듯한 말투로 다시 처방해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인간적인 목소리였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경추에 주사를 맞기로 했는데, 의사는 엎드려 누운 내게 브래지어 끈을 풀라고 했다. 나는 그때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오히려 간호사가 나서서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아니, 도대체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위치는 경추인데 왜 브래지어 끈을 풀어야 하나요?”
의사는 자신감 없는 말투로 주사액이 흘러나와서 등을 적실 지도 모른다고 했고, 간호사는 목과 브래지어 끈의 위치가 얼마나 먼지 설명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정작 나라는 인간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말이다. 그저 의사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던 나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준 그 간호사에게 지금도 감사한다.
재미있는 건 의사들의 치료 방법보다는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인데 왜 안 그렇겠는가. 의사의 태도와 말 한마디는 환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태도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고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겪어 보니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가 실력도 더 좋은 것 같다.
병의 원인을 찾는 과정은 혼자서 길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지도를 보며 버스를 갈아타고 걷고 다시 지하철을 타는 과정이다. 16번은 홍대입구역 가고, 271번은 충정로역 가고, 이렇게 정해진 노선 중에서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버스를 골라 타야 한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중간에 내려야 하고, 맞는 것 같으면 많은 정류장들을 지나치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어야 한다.
진료과목은 버스 노선과도 같다. 재활의학과에 가면 재활의학과의 해석과 치료법이 있고 신경과에 가면 신경과의 해석과 치료법이 있다. 여기 가면 이 병명, 저기 가면 저 병명, 같은 증상에 병명은 열 개가 넘는다. 아무 버스나 타기만 하면 저절로 목적지에 갈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쉽게도 그 시절의 나는 온갖 버스를 다 타보면서 길을 헤매고 다녔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던 적도 많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마다 느껴야 했던 좌절감. 인생에 실망하는 연습도 필요하다면, 아마 나는 그때 충분히 해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