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셋째딸 Sep 24. 2021

산티아고 대신 동네 산책

매일 딱 한 시간만 여행자처럼 살아보기

회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긴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독 눈에 들어오던 때가 있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 자리를 잡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등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      


회사를 박차고 나올 용기는 없었지만, 혼자 떠날 용기는 부려볼 만했다. 그래서 흉내를 내본 것이 열흘간의 그리스 여행. 추석 연휴와 남은 연차를 붙여서 떠났더랬다. 칙칙한 회사생활이 지겨워서 일부러 햇살 좋은 지역을 골랐는데, 그곳이 그리스였다. 상상으로만 그려보았던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 혼자 온 여행객을 친절히 맞아준 사람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확실히 새롭게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열흘 휴가의 효과는 딱 사흘 지속되고 끝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고 사흘이 지나자, 때 빼고 광냈던 멘탈에서 윤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달 휴가였다면 열흘쯤 갔을까? 1년 휴가라면 4개월쯤? 역시 회사를 그만둬야 해결될 문제인가?      


하지만 여행을 자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도 나름의 부작용을 겪는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이 못 견디게 지루해서 다시 떠나고 싶은 기분을 자주 느낀다 하고, 1년 이상의 긴 여행이라면 이미 그 자체가 일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멘탈 신선도 역시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단다.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어떤 분은 복잡한 서울이 오히려 그립다면서, 돌아가고 싶어도 집이 안 팔려서 골치라고 하소연한다.      


물론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수많은 즐거움을 평가절하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단지 떠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뻔한 이야기 같겠지만, 장소를 바꾸기 전에 먼저 나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매일같이 진지하게 임하는 노력이다.     


여행자와 시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는 점, 그러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우선 여행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낯선 것을 좋아한다. 낯선 풍경, 낯선 음식, 낯선 사람을 찾아 돈과 시간을 들여 멀리 떠난다.      


시인은 익숙한 풍경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이제 막 여행지에 도착한 사람처럼 하루를 산다. 매일 똑같은 장소, 사물, 음식, 사람에게서 새로운 면을 찾아내고 감탄한다. 이 역시 특별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재능을 타고나는 이들도 있다. 개와 고양이가 그렇다. 매일 걷는 똑같은 산책로인데 함께 걷는 개에겐 늘 새로운 모양이다. 이곳저곳 냄새 맡고 관찰하느라 엄청 분주하다. 고양이 역시 매일 똑같은 창밖 풍경을 마치 처음 보듯이 관찰한다. 단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애들 같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개와 고양이처럼 살자는 말은 아니다. 단지 하루 중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주일 중 단 하루만이라도 개와 고양이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여행자가 여행하듯이, 시인이 시의 소재를 찾듯이, 개가 산책하듯이, 고양이가 창밖을 구경하듯이 살아보는 것이다. 평소에는 꺼두었던 관찰 레이더망을 그 시간만이라도 작동시켜보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주로 아침 산책길에 관찰 레이더망을 켠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세밀하게 살핀다.      


이런 곳에 꽃이 피었네? 

이 나뭇잎은 꼭 하트처럼 생겼구나. 

이곳에 새 카페가 생기려나보다. 다음에 가봐야지.      


신기하게도 똑같은 장소인데 매일 새로운 것을 하나씩은 발견하게 된다. 익숙한 데서 새로운 것 찾기. 특별히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일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을 활용해도 좋다. 주변의 공기와 온도, 가게의 불빛과 음악소리를 천천히 감상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트 쇼핑도 비슷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새로 진열된 상품을 관찰하고 만져보면서 천천히 그 시간을 즐겨보자.      


바빠 죽겠는데 굳이 이런 시간을 왜 가져야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신경이 이완되고 감정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실제로 시장이나 마트 한번 둘러보고 오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주부들이 많다.       


최대한 빨리 걸어서 칼로리를 소모해야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배분해서 살 것만 딱 사고 나와야지. 이런 태도는 건강이나 시간 관리에는 도움 될지 모르지만, 감정 이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최대한 느긋하게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꼭 산티아고까지 가야만 할까? 하던 일을 다 내팽개치고 멀리 떠나야만 할까? 나라는 사람, 산티아고에서 한꺼번에 찾아도 좋겠지만, 동네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 혹시 아는가. 매일 여행하듯이 천천히 걷다 보면, 본래의 내가 천천히 걸어 나올지.

이전 16화 님아, 그 산에 오르지 마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