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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Dec 10. 2023

나는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오래전 연인이었던 신동엽과 이소라가 23년 만에 조우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20대였던 두 사람이 50대가 되어 만났다. 한 사람은 여전히 싱글로, 한 사람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 23년...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처음 둘이 만나는 장면은 지켜보는 사람까지 긴장하게 했다.


[출처] 유튜브 채널 메리앤시그마  - 이소라의 슈퍼마켙 캡쳐


웃으며 대화하다가 중간중간 긴 침묵이 흐를 때면 괜히 뭉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침묵 안에 무수한 말들이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마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 또한 지난 연인인 누군가를 떠올리며 대입해 보고 있지 않았을까?


헤어지고도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리 나쁘게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시간이 흘러서도 '너 참 멋진 사람이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도 멋있었다. 어찌 보면 서로가 서로를 오롯이 마음에서 떠나보냈기에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헤어진 그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그와의 강산이 변할 만큼의 오랜 연애 기간만큼 나의 일상에서 그가 흐릿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 잊었다고 말하면서도 돌아보면 미움, 서운함, 애증 등의 여러 형태로 일말의 감정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며 그를 정말 떠나보낼 수가 있었다. 지난 글들 속에 그는 여전히 미움과 분노, 서운함의 감정으로 남아있다. 그것마저 애정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를 글에 내려놓고 나서야 진정으로 그가 사라져갔다. 그와 만났던 시간 버금가게 지나고 나서야.


다행인 것은 나는 그와 접점이 전혀 없다. 공통되는 지인이나 모임조차 없다. 오랫동안 질질 끌다 헤어져서 그런지 헤어지고 나서 '잘 지내?'라는 메시지 한번 서로 보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이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그와의 시간이 혹시 꿈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그는 드라마 작가였다. 만나기 시작했을 때는 작가가 아니었지만, 우리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는 주목받는 작품을 집필한 작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창작의 고통과 압박 속에서도 틈틈이 애인 노릇을 하느라 노력했을 텐데 그 때문에 항상 미안함을 안고 있었고, 나는 그가 일에 몰두하도록 연락하지 않고 바라만 봐주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연애 속에서 언제나 그의 부재에 목말라 있었다. 그것도 애정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 막판에 질긴 인연을 놓지 못하고 있었을 땐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다 틀어진 수레가 덜컹거리며 길을 달리듯 매일매일 위태로웠다.


그와 겨우 이별을 하고 2년쯤 지났을 때였던가? TV를 보다가 우연히 새로운 드라마 예고편을 보게 되었다. 예고편만 보고도 단번에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방구석 백수였는데 그의 새 작품 소식을 들으니 묵직한 억울함이 명치에 얹혀있는 것만 같았다. 이별 이후, 나는 보란 듯이 잘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으로 잊을 연애도 하지 못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드라마 반응은 나름 좋았지만, 나는 볼 용기가 없었다. 시청자 댓글을 보고 내용을 유추할 뿐이었다.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시청자들이 아리송해하는 캐릭터 설정의 이유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 혹시 내가 녹아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가 기억하는 나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그를 굳이 검색하거나 찾아본 적은 없다. 새 작품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폐인 같은 몰골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책상 한가득 담배꽁초를 쌓아두며 글을 쓰고 있으려나?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에 도움이 되는 든든하고 야무진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을까?


이제는 지난 일들로 서운하지도, 화도 나지 않는다. 그와 데이트했던 곳, 식당, 카페 앞을 매일 지나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그와 함께 갔던 곳'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연한 마주침도 두렵지 않다. 그렇다고 신동엽과 이소라처럼 허심탄회하게 만나 술 한잔을 기울이고 싶은 욕구도 못 느낀다. 그들처럼 '당신 그때 참 멋진 사람이었어'라고 할 만큼 좋은 기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쓰고 나면 내 속에 남아있던 그에 대한 부스러기들까지 모두 내려놓게 될 것 같다. 이제야 진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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