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이모의 아들 중 첫째 오빠에 대한 얘기였다. "아.., 왜 그런데?"별 뜻 없이 대꾸를 했다. 그저 오랜 기간 못본, 사촌의 안부를 묻고 답한 걸로 생각했었다. 엄마가 전한 사촌오빠의 근황은 안쓰럽게만 들렸다. '이모가 걱정이 많겠네..'라는 마지막 답변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모에겐 참, '아픈 손가락'으로 여겨지는 사촌오빠였다. 익숙한 레파토리였고 대화 화제였다. 평소대로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얘기. 그런데 내 뇌리에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모지. 이 기시감은..., 어디서 똑같은 일을 꼭 겪은 것 같은데...'
그 순간 반복되는 데자뷰 같은 걸 느꼈고,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이런 식의 '오빠걱정' 얘기를 수도 없이 엄마나 이모로부터 들어왔던 것이었다. 마치, 틀면 나오는 티브이뉴스나 연예인 가십거리처럼. 엄마의 한숨 어린 말은, '이모의 마음이 안 좋을 테니 걱정이다..'라는 뉘앙스로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모가 속상한 이유는 그녀의 큰 아들 때문인데, 좁디좁은 작은방 안에서만 지낸다는 이유였다. (그의 가족들이 결혼으로 각각 분가를 하고 난 후) 왜 이었는지는 모르나 다른 큰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좁고 답답한 작은방에서 지낸다고만 했다(듣기로는)
사실, 이런 가족 중 한 명에 대한 걱정은 보통의 가족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다. 가족 중 좀 더 신경이 쓰이고, 손이 많이 가는 자식에 대한 속담도 있지 않은가.보나마나, 그는 이모의 열손가락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십수년째 그 사실은 변한 게 없었다.
착한아들(딸)이 된 결과는 처참했다
아빠의 장례식을 모두 마치고 가족들만 남아있을 때였다. 상복을 벗고, 식당에서 밥을 한 끼 같이 먹고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지친 나머지 내 집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엄마가 걱정이 되어 조금 더 있기로 했다. 나는 그들의 정체를(나르시시즘) 이제는 알지만, 그들은 내가 안다는 걸 모른다. 그렇기에 이 또한 일종의 연극이 따로 없었다. '보통의 딸'이라는 가면을 쓴 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모르는 건, 내가 그들을 파악하고 있고 예전과 달리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엄마와 동생과 나, 그리고 이모는 소파에 앉아 3일간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여동생은 이런저런 지출내역을 정산하고 있었고, 엄마와 이모는 장례식에서 본 손님들과 친척들에 대한 대화를 편하게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엄마의 친한 지인 얘기가 나왔다.
"그 A는 왜 이렇게 내 눈치를 보냐..., 날 이상한 사람 만들고.. "이모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모는 엄마의 지인인 A가 답답하다며, 자신을 나쁜 사람 만든다는 사소한 불평을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A란 지인이 매번 이모의 눈치를 보고, 쫄아있는 게 꼴 보기가 싫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모의 그런 불평은 사실, 아빠 장례식에서도 몇 차례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엄마가(자신의 동생) 과거에 이모를 나쁜 사람으로 주변에 소문이 나게 만들었다며, 왜 자신을 이상하게 말해서 사람들이 자길 오해하게 하냐는 하소연이었다. 너무 진심으로 말해서 나도 모르게 '그래요? 왜 그러지~'(오해를 했나..)하고 답을 했었다. 그러자 그녀는 더 신나서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사람들이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토로했다. 나를 제삼자로, 엄마의 딸이 아닌, 자신의 편으로 여기는 듯했다.(아마도, 장례식동안 내적 친밀감이 쌓여서)
그런 식의 레퍼토리를 집안에서 또 듣게 되니, 문제가 분명히 보였다. 이건 그녀의 착각이고, 피해의식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 A라는 아줌마는 나도 어려서부터 익히 잘 아는 분이었고, 이모의 심한 지적질이나 센 말투를 무서워하는 거였다. 사실, 어릴 적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생과 나는 이모를 어려서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는데 이모의 큰소리와 지적질에 늘 불안해하고 피하고 싶었다. 모친인 엄마도 자신의 언니를 두려워했고, 적잖이 상처를 쌓아왔다는 고백을 커서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이기에 이모가 아무리 진심같이 자신을 곡해하고 나쁘게 말한다는 불평을 늘어놓아도, 믿을 수가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편을 들어주는 식으로 대꾸하지 않으면, 또 다른 억울함이 쏟아질 거 같아 마지못해 '아... 그래요'정도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화는 어린 시절 추억이나 가족들의 옛이야기 따위가 흘러가고 있었고, 나름 어찌 보면 훈훈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파트는 끝나가고 있었다.(속으론 빨리 집에 가서, 이 불편한 의무들을 다 벗어던지고 발 뻗고 쉬고 싶었다)그러나, 이모의 긴 얘기는 쉴틈이 없었고, 중간중간 동생이(짜증이나서)끼어들거나, 엄마와 나의 반쯤 포기한 대꾸들이 계속됐다. 이런 속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모는 자신이 주인공인 양, 눈이 반짝해진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히 이모의 두 아들 얘기로 이어졌다.
"걔가 몇 개월 동안 지 용돈을 안 쓰고 모았다가 날 줬잖아~회사에서 준 금 몇 돈도 나 주더라고...
내가 그 돈 왜 안 쓰냐고 니 써라 했지.., 그런데 자긴 필요 없다고 엄마 쓰래"
"아이고... oo오빠가 진짜 이모를 많이 생각하네. 착한. 아들이네"
이모는 본인이 한 얘기에 감동을 받은 사람처럼, 흥분했다.' 착한아들'을 둔, 자신이 빛난다고 여겼는지..., 그 당사자를 향한 우리의 칭찬이 마치 자신에게 향하는 것처럼. 그녀는 트로피를 받은 사람 같았다. 사실 나나 다른 가족의 속마음은 사촌에 대한 안쓰러움과 이모가 자신의 아들을 좀 신경 써서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자신..., 자신의 노고, 자신의 아픔에 집착하고 그걸 알아주니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의 아빠와 일치했다)
그 뒤, 한 달이 흐른 뒤, 엄마와의 저 통화 후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여전히, 진실을 추적하는 탐정이 된 것만 같았다. 사촌 오빠를 걱정하는 이모, 그리고 그 얘기를 전달하는 엄마, 그걸 들은 나. 아직까지도, 결정적인 뭔가가 풀리지 않는 찜찜함이 있었다. 도대체, 이 데자뷔 같은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답답한 심정으로 이런저런 증거들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그러다 떠오른 단서에 '헉.....'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촌오빠의(작은방에 갇힌) 모습은 어릴 적의 내 모습과 같았다. 그래서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마구 유튜브 금쪽이 영상들과 엄마와 딸의 영상이나 책 등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집착했다. 그리고 얼마뒤 깨달은 건, 안타깝게도 사촌오빠의 모습은 우리 집에서 나를 대하는 가족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늘 한숨 어린 표정과 너로 인해 우리가 힘들다, 불쌍하다는 뉘앙스의 동정 어린 말들..., 그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패턴이었고, 늘 겉으로는 자신들이 날 걱정하는 것처럼 포장되었다. 그래서 늘 듣고 나면, '나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이구나' '내가 너무 부족하구나'하며 자기반성과 후회, 미안함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고 단단한 사실로 들렸다. 이전의 나에게는.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잘해야 했고, 더 보답을 해야 했고, 늘 몬가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는 의무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난 가족들에게 큰 '빚'이 있는 채무자가 돼버렸다. 그리고 그 빚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아빠의 화장터에서 아빠의 친한 지인은 내게 말했다. '너는 아빠의 가장아픈. 손가락이었다'라고. 그때 나는 순간 울컥해서, '그게 숨겨진 아빠의 진심 같은 걸까...' 하며 알아채지 못한 내 부족함을 탓하고, 내가 좀 더 이해하고 다가갔어야 했다라며 후회를 했다. 그런 감정들 때문에 한 달은 일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원인인 것 같아서, 내 불찰과 부족함인 것 같아서. 죽은 자는 더는 말이 없기에..., 일반가족처럼, 살아계실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이 후회스러워서 등이었다. 하지만, 차가워진 이성으로 엄마와 이모의 그 사촌오빠에 대한 걱정 레퍼토리를 조사해 봤을 때, 자신들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란 이 말 뜻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그 뜻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우리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식들의 부족함을 탓하고, 원인은 니들이다!'라고 잘못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좋은 부모 같은 생색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함, 자신들의 떳떳함, 무죄, 고귀한 부모는 죄가 없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그걸 사람들이 잘 쓰는 격언으로 포장한 것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선함을 강조하고 잘못을 남 탓으로 뒤집어 씌운다. 그리고 상대에게 크나큰 죄책감으로 후회가 남도록 조작하는 것이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것이 날조된 거짓이라는 걸 그들도 전혀 모른다. 왜냐면, 자기 자신들조차 '좋은 사람(부모)'이란 프레임으로 속이기 때문인데, 이건 정말 감탄할만한 완벽한 거짓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