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가족 구조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위치가 정반대로 바뀐다. 나는 주변에서 열심히 일하는 착한 딸(아들)이 부모의 사업빚이나 생활비를 책임지느라 청춘을 다 보내는 모습을 수없이 보고 들었다. 부친이 사업을 하다 갑자기 망하거나 또는 원래 생활 능력이 거의 없는 경우였고, 한두 번만 그렇다면 그래도 가족이니 이해를 해볼 텐데 그들은 매달, 매년을 자식 한 명의 등골을 빼먹는 '밑 빠진 독'과도 같아 보였다. 그것도 착한 아이에게 효도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말이다. 나는 사회생활에서 그런 '착한 딸'과 친해진 뒤, 그런 고민을 수 차례 들었다. 한결같이 그들은 답답해하고 우울해 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수긍했다. 나도 겪어본 일이고, 우리 가족도 오랜 기간 그래왔기에(물론 나는 이기적이기에 한두 차례 이후, 수금역할을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진심으로 '여동생'처럼 걱정이 돼서 몇 번이나 그녀들에게 조언을 해줬다.
"이제 너도 가족으로부터 독립해야지.., 힘들다고 하셔도 돈 없다고 거절해. 습관이 돼서 기대하는 거야.."
"하지만..., 휴우 저 아니면 돈 해줄 사람도 없는데. 그럼 부모님은 어떡해요.. 빚이 연체라도 되면"
가족인지라 딱 잘라 거절이 어려워 보였고,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연민과 큰 책임감을 느껴서 어쩔 수 없다며 자포자기한 태도였다. 그렇게 20대 꽃 같은 청춘에 그들은 가족부양하는 실질적 가장이 되어 버렸다.
나도 몇 번은 조언 아닌 조언이나 방법도 제시해 보고 했지만, 그들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내가 몰 모른다고 할 것 같아 말을 그만두었다. 그녀들은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서 월급을 모아도, 남는 게 없으니 늘 지쳐 보였고 자신의 시간과 돈을 부모를 대신해 '부모역할'을 하느라 쉴틈이 없어 보였다. 물론, 나도 20대 때 적지 않게 집에서 눈치가 보였고, 내가 내 돈을 모아서 무언가를 하거나 쓸 때도 '이기적인 애'가 돼버렸다. 그러니, 나도 속은 편하지 않았다 가족의 원망이나 힘듦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그때도 나는'이게 내 일은 아니다'라는 판단이 있었고, 원망과 요구를 들으면서도 거절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뒤로 가족들의 원망과 무시, 가족 내 고립은 표면적으로 더욱 심해졌다. 물리적 독립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착한 자식들은 왜 거절을 못할까, 다 지나친 연민과 학습된 책임감 때문
우리가족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장의 역할 부재로 인한 그 책임을 엉뚱한 사람이 지는 게 가장 컸다. 아빠는 생활비를 중학교 이후로 본인이 거의 벌지 못한 것을 엄마나 동생에게 책임지게 했다. 한두해 일이 잘 안 되고 직업을 바꾸면서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어느새 모든 가사와 양육에 생활비 부업까지 하게 되었고, 그 방식이 괜찮다고 여겼는지 아빠는 언젠가부터 책임을 철저히 회피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은 가족을 자신의 필요나 요구를 당연히 들어줄 어떤 '도구'로서 여겼기에 그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는'가사와 밥' 의무, 동생은 필요할 때 돈을 주는'은행의 의무', 나는 한때 그를 빛내줄 '트로피'였으나 기대를 철저히 벗어나, 쭈욱 '감정쓰레기통'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아빠의 '돈에 대한 집착'은 이상할 정도였고, 나머지 가족이 자신의 몫인 자원을 낭비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수입을 그의 용돈으로 전부 쓰고, 부족한 돈은 엄마나 자식들에게 기대하는 식이었다. 엄마는 전업 가사에 파트타임 일까지 하고 있었고, 여동생은 어린 나이부터 생활 전선에서 돈을 벌어 생활비를 내고 아빠의 빚을 갚고 있었다. 이런 '이상한 가족구조'는 언젠가부터 당연시 여기게 되었고, 한두 번밖에 아빠의 돈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나는 '쓸모없는 자식'이 되었다. 일찌기 내 용돈을 손 벌리지 않고,취업을 한걸로는 그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은밀했던 가족들의 하대와 무시,차별이 대놓고 극심해진 게 이때부터였다.
그래도, 나는 맘 한편으로는 아빠가 안쓰럽고 힘들게 일하는 게 내 잘못처럼 신경이 쓰였다. 동생이 벌어오는 생활비도 내 잘못 같았고, 엄마의 늘 지친 얼굴도 불쌍하기만 했다. 20대의 내 삶은 늘 죄책감과 수치심이 따라다녔다. 가족이 나에게 지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가장의 역할이나 부모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뿐 아니라, 그 수치심까지 대신 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책임회피와, 감정회피로 인해서...,
"문제가족은 과도한 역할을 대신하는 이가 있다" 트라이앵글구조로, 늘 한 명이 다른 이에게 착취당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구조는 트라이앵글구조로, 누군가가 다른 이를 착취하는 구조였다. 그걸 여태껏 들키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가족이란 이유였다. '효',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할 '도리'라는 것이 그 구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의 받아야 할 권리이자 자식의 의무를 심하게 극대화시킨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일 때도, 아빠가 고생해서 돈을 버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수학여행 조차도 미안했다. 생각해 보면 주변의 어려운 친구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아빠가 가족들 때문에 고생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받은 용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고대로 모아서 아빠에게 돌려준 적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피아노 학원을 몇 개월 다녔는데 학원선생님이 얼마뒤 콩쿠르에 나가자고 했고, 거기 참가비랑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얘기에 아빠가 부담이 될까 봐 거절을 한 적도 있었다. 단순히 배려심이 많은 부모를 생각하는 '착한 아이'로 보기엔, 지나치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 까닭은 늘 아빠본인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고 있는지, 우리가 돈을 아껴 써야 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아빠는 우릴 다 자란 성년처럼 말했고, '스스로 알아서 살아라', '부모에게 기대지 말아라' 또는 아빠 없이 자란, 부친의 지원 없이 잘 성장한 사촌들 예를 수시로 읊어댔다.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막히고, 내가 부족하고 돈을 낭비하는 기생충이 된 것 같았다.
성인이 된 여동생은 아빠와 무척 닮았음에도, 중요할 때는 그에게 항상 지는 역할이었다. 그녀는 성인이 돼서 한동안 아빠의 회사에서 사무일을 한 적이 있는데, 여러 영업처와 통화를 하는 일이 잦았다. 하루는 돈 '수납'문제로 거래처 직원과 아웅다웅 따지고 있었다.
"저희 아빠가 다른 건 몰라도, 시간약속 철저히 지키고 회사사정 어려워도 직원 월급도 더해서 주시는 분이에요. 일도 제일 먼저 나가서 할 정도로 부지런한데... 흑...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여동생은 말문이 막혔는지, 훌쩍훌쩍 흐느끼며 말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거래처 직원이 아빠에 대한 불만이나 험담 비슷한 걸 했었나 보다. 이런 모습은 비단 동생뿐 아닌 엄마나 나에게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매일매일을 부딪치면 큰소리만 나고, 한집에 살기 싫다, 힘들다 하면서도 우리는 아빠를 위해 변호하고 호소하고, 그의 책임회피로 인한 경제적 문제와 여러 사업 실패의 빚과 술과 친구들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빠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생각했고, 종종 까다롭고 성질을 내지만 속마음은 여리고 타인에게 잘 베푸는 인정이 있다고 철저히 믿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를 착취하고 은밀히 조종했고, 엄마는 동생과 나에게 그러했고, 그리고 서열구조에서 젤 밑바닥인 나는 누구에게도 착취당하지 않으려 했으나 늘 엄마한테는 지는 구조였다. 나는 아빠에게서 엄마를 늘 구하려 했고 지키려 했으나, 엄마는 자신을 지키기는커녕 아빠를 변호하고 지키는데 혈안이었다. 아빠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통제와 집착을 했고, 자신의 부조리함이나 호통에 어느 순간부터 대적하고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심각한 반항으로 여겼다.
내가 집을 나간 날, 아빠가 수첩에 일기를 썼다는 얘길 십 년이 지난 최근에 엄마로부터 듣게 되었다. 내가 아빠와 싸우고 독립한 것을 일종의 배신처럼 여겼는데, 그날 일기로 "oo이가 오늘 집을 나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는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난 성인이 된 지 오래인데도 그 정도의 집착과 통제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성인이 된 지 한참 돼서도 부모와 떨어지지 못하는 '의존적인 성인'이 문제가 아닌가 반문하고 싶었다. 내 추측엔 아빠는 한때나마 자신을 빛내준 '트로피'역할의 자식에게 막간의 기대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걸 애정이라 사람들은 표현했지만, 나에겐 아빠의 망상이자 책임 회피이자 숨 막히는 통제였다.
자신이 일종의 투자를 한, 기대를 한 자식이 커서 이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게 자신의 실패감, 무능감을 자극시켰기에 그때부터 나를 보고도 인사도 받지 않고 침묵을 내내 지키는 '일종의 벌'을 그는 내렸다. 가족들은 이렇게 한명의 도구이자 수단이자 손.발이 되어 그 끈끈함으로 모든걸 덮어주고 눈감아주는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