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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미오네 May 10. 2024

복싱장에서 받은 츄파춥스 포도맛

스몰 토크

샤워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몸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탈의실로 들어왔고 어제와 같은 장면에서 서로를 두 번째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오늘도 밝고 씩씩하게, 말하자면 요즘 시대 어린아이 같지 않게 상냥하고 예의 있게 내게 인사했다.




어제는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만을 나누었다면 오늘은 아이가 내게 대뜸 츄파춥스 사탕을 준다. '왜 내게 이걸 주는 것이지?' 방어적이고 경계적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 고마워 근데 왜 주는 거야?" 나체로 있어서 그런지 생각이 곧장 입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말을 뱉고 나서 '당황스러워하는 나'에게 순간적으로 초점을 이동했더니 아이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더니 "이건 어디서 난 거야?"라고 질문했다. 아니 사탕의 출처를 알고 싶은 게 아닌데! 그 어디서 난 사탕인들 잘 먹을 건데 대화기술 교육을 어디서 받아야 할까. 이런 뒷 생각을 하고 있는 나와 달리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GS편의점에서 샀다고 답했다. 




"복싱 얼마나 했어?" 드디어 나는 올바른 대화의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그렇다, 내향인인 나를 인정해 주자. 처음이 어려울 뿐 대화를 잘해나갈 수 있다. 아이는 2~3주 정도 되었다고 했다. 나는 오늘이 둘째 날이라고 어제 우리가 만났을 때가 사실 첫날이었노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이도 따라 웃었다.




"복싱 어때? 재밌어?" 복싱 선배인 이 아이에게 내게 다가올 미래를 묻고 싶었다. 어차피 등록을 3개월 해버려서 계속 다닐 거지만 말이다. "음.. 단체로 같이 하는 수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였다. 적당한 톤과 말투를 사용해서 말이다. 나보다 대화를 더 잘하는 듯싶었다. 이 아이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또렷하게 내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는 복싱이 혼자 하는 운동이라서 힘들다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 복싱은 원래 나와의 싸움이다. 이걸 모르고 복싱을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성향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인다고 생각했다. 아아아, 이 아이는 엄마가 다이어트하라고 이곳으로 보냈단다. 아이의 의사로 이곳에 온 게 아닌 것이다. 




다이어트 복싱. 초등학생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내가 이 아이의 나이였을 때는 지금처럼 다이어트라는 개념이 우리들 속에 침투하지는 않았다. 이 보들보들한 아이의 입에서 다이어트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어른 중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다.  




저녁 식사 후 간식으로 선물 받은 사탕을 먹고 있었다. 자연스레 이 사탕을 준 아이가 떠올랐다. 츄파춥스 포도맛은 오랜만에 먹으니 참 맛이 있었다. 막대사탕을 언제 마지막으로 먹어 봤더라 기억을 뒤적여 보며 순수한 행복을 느꼈다.




그날밤, 자려고 누웠는데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이에게 무얼 줄까, 우리의 만남 여부가 불명확하니 나도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게 좋을까, 무슨 말을 또 하지,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 운동도 종류가 많으니까 본인에게 맞는 운동을 선택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그 애를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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