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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Jan 19. 2018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시간

교토 니조조


가끔 나는 엉뚱한 이유를 핑계로 결정을 내리곤 한다. 만약 그곳이 여행지라면 더더욱 그럴 확률이 높다. 평소보다 조금은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 싶달까. 매번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어리광일지도 모른다. 


신리쇼쿠도森林食堂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결정 역시 그저 ‘나무木’가 다섯 개나 들어 있는 근사한 상호명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카레 식당답지 않은 이름. 숲에 둘러싸인 공간인 걸까, 아니면 천 년 묵은 나무라도 입구에서 있는 것일까. 식당의 정체가 궁금해 계획에 없던 니조조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산조카이쇼텐가이三条会商店街는 니조조마에역과 니조역 사이의 아케이드 상점가다. 겉으로 보기엔 주민들이 허물없이 드나드는 조촐한 시장 같지만 무려 1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장소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가르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망원동의 시장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자전거 앞바구니에 과일과 채소 하물며 강아지까지 태우고서 시장을 누비는 활달한 뒷태가 영락없이 닮아 있다. 


상점가 중반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아이들이 시끌벅적 뛰노는 놀이터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마치 돋보기로 햇빛을 끌어모은 듯 주변의 모든 볕이 모래사장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놀이터를 볼 때면 괜히 걸음이 느려지고, 벤치에 앉아 쉬고 싶어진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아케이드를 빠져나오자 아까 전 지나친 골목과 엇비슷한 생김생의 골목이 다시 이어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한때 쇼군의 거처로 쓰인 니조조 인근의 동네라기엔 그저 평범한 모습이다. 관광지 주변의 요란함은 온데 없고 좁다란 협소주택이 서로 마주보며 늘어서 있다. 무심코 터진 헛기침 소리가 부끄러울 만큼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다 이따금 창 너머로 사람들의 대화나 그릇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올 뿐이다. 불현듯 어느 여름방학의 아침이 떠올랐다. 이미 잠에서 깼음에도 이불 속에서 한참을 뭉기적대며 엄마의 도마 소리, 그릇 씻는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던 순간의 안락함. 보장된 행복. 


주인 할아버지 홀로 자리를 지키는 문구점과 텅 빈 점포, 이발소 앞을 지나자 그토록 궁금했던 카레 식당이 마침내 모습을 보였다. 울창한 숲도, 천 년 된 나무도 없었지만 나는 단번에 신린쇼쿠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식당 입구는 독특한 잎사귀를 가진 이름 모를 식물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미루어 짐작건대 이곳 주인은 성실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렇게나 많은 식물들 중 무엇 하나 시들어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렇다. 바지런한 손으로 요리한 커리 맛은 얼마나 깊고 진할까. 군침이 고인다.




<교토 산책자를 위한 공간>



신린쇼쿠도

젊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인도식 카레 식당. 흑미밥에 바삭한 난을 곁들인 장기 숙성 치킨 카레와 시금치가 들어간 키마호렌소 카레 혹은 반반 자리를 양보한 치킨&키마호렌소 카레는 이곳의 추천 메뉴. 교토에서 미술 대학을 졸업한 부부의 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음식의 담음새는 물론이고 주문 제작한 듯한 나뭇잎 모양의 그릇, 공중에 매달린 모빌 하나 하나에 눈길이 머문다. 2012년 지금의 자리에 식당을 오픈하기 전까지 신린쇼쿠도는 케이터링 서비스로 먼저 유명해졌다. 여전히 외부 출장이 잦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통해 반드시 휴무일을 확인할 것. 나 역시 무턱대고 찾아갔다 헛걸음을 했지만, 어쩐지 여행에서는 맛있는 한끼를 위해 들이는 작은 수고가 마냥 귀찮지 않다.





니조코야

허름한 민가를 고쳐 만든 니조코야는 동네의 작은 선술집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스탠딩바에 기대어 시원한 나마비루(생맥주)生ビール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듯, 커피의 뭉근한 온기로 지친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메뉴 중에는 위스키와 맥주, 와인도 함께 준비되어 있다. 하루를 매듭짓기에 더없이 완벽한 공간. 마치 짧은 의식을 치르듯 손님과 마주선 채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마스터의 숙련된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또한 이곳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된 커피를 대접받는 가벼운 호사를 누릴 수 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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