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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정 Jan 26. 2018

비가 그치지 않아도 좋을

교토 가와라마치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가 있는 고조에서 한큐 가와라마치역으로 나서는 길. 가모강鴨川과 나란히 누워 흐르는 다카세 운하를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궂은 날씨에 속상했던 마음도 잠시, 비 내리는 운하를 따라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흙냄새를 품은 풋풋한 아침 공기에 입안마저 개운하다. 


날씨에 따라 하루의 운이 좌지우지되는 여행자의 야속한 운명과 달리 교토 주민들의 일상은 비에 아랑곳없이 흘러갔다. 어제 아침 숙소 부근에서 보았던 청년은 오늘도 조깅 중이고, 상인들 역시 장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자전거 통근길도 막지 못했다. 비닐우산을 한손에 쥔 채 도로를 가로지르는 회사원의 몸짓에는 흔들림이 없다. 


여행에서 목격한 도시의 아침 풍경은 언제나 나를 안도시켰다. 어제와 다름없이 학교로, 일터로 떠나는 사람들의 분주한 뒷모습은 여느때의 나와 닮아 있다. 파리의 에펠탑과 피렌체의 두오모 근처에서도 나는 익숙한 뒷모습들을 보아왔다. 그 어디에도 특별한 삶은 없다는 것. 하지만 그 자명한 진실은 깨달음과 동시에 쉽게 잊히곤 해서 나는 매번 부질없이 여행을 떠나고 만다.







한큐 가와라마치역 일대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과 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출근길 직장인으로 북적였다. 교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답게 유명 브랜드 매장과 드러그 스토어, 기념품 가게가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 가며 자리를 선점하고 있다. 뻔한 도시 풍경이 시시하게 느껴지면서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외국어와 시선을 붙잡는 낯선 가타카나 간판, 바닥을 긁는 캐리어 소리에 마음이 금세 들떴다. 


구글맵으로 식당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인파를 피해 OPA 빌딩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좁은 길을 따라 색색의 입간판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는 이곳은 내가 알고 있던 교토의 단정한 골목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어딘지 불량스럽다. 목적지를 코앞에 둔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서야 존재감 없이 서 있는 ‘츠나구 쇼쿠도’의 입간판을 발견했다. 이 식당을 알게 된 건 우연히 읽은 일본인 블로거의 후기를 통해서였다. 교토로 이주한 젊은 여주인, 바테이블이 전부인 협소한 공간, 쇼핑가 뒤편에 숨어든 식당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식당 안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과 달리 자리에는 이제 막 식사를 받은 듯한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주인은 주문받은 음식을 요리하는 동안 나와 옆자리 손님에게 이따금 말을 걸었다. 물이 끓거나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의 대화는 세 사람을 둘러싼 어색한 공기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끊길 때면 나는 그녀의 요리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법한 소박한 주방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을 꾸려 간다는 사실이 어쩐지 놀라웠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다카세 운하로 돌아온 나는 '트래블링 커피'가 있는 옛 초등학교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침 가방 안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얇은 단편집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오늘만큼은 종일 비가 내려도 좋을 듯하다. 



<교토 산책자를 위한 공간>




트래블링 커피

낡은 나무 책상과 의자, 걸음마다 삐걱대는 마룻바닥, 용도를 잃은 칠판. 1993년 폐교한 초등학교 교무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트래블링 커피는 그 이름처럼 과거의 어딘가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선사한다. 하물며 카페로 향하는 길마저도 인상적이다. 다카세 운하를 따라 걷다 마주친 옛 학교의 정문을 지나 한때는 아이들로 가득했을 복도에 들어서면 아릿한 바람이 마음을 스친다. 까맣게 잊고 있던 추억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핸드드립으로 내리는 커피는 300엔이라는 저렴한 금액이 무색할 만큼 맛이 좋다. 커피 애호가라면 이곳에서 열리는 ‘인조이 커피 타임ENJOY COFFEE TIME’ 일정을 미리 확인해 보길. 커피를 테마로 한 부정기이벤트로 교토의 유명 카페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츠나구 쇼쿠도

번화한 가와라마치도리의 뒷골목 2층 건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작은 식당이다. 일곱 명 내외가 앉을 수 있는 카운터석과 오픈 키친이 공간의 전부. 식당 오너이자 요리사인 요코 씨는 도쿄에서의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건강식에 관심을 가지면서 요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표 메뉴는 교토의 제철 유기농 채소로 만든 여덟 가지 반찬과현미 주먹밥으로 구성된 키세츠노 오반자이 플레이트. 뜨겁게 달군 철판 팬에 담은 미트소스 스파게티 또한 인기다. 오전 10시부터 운영하는 덕분에 늦은 아침 혹은 이른 점심 식사 모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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