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까 말까의 문제가 아닌 무엇을 어떻게 사는지의 문제
살면서 ‘소비한다’, ‘뭔가를 산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그다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은연중에 소비한다는 것을 조금 부정적으로 여겨왔다. 생필품을 살 땐 그렇지 않았는데, 옷이나 가방을 샀을 때 찾아오는 막연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웨덴에 살면서 생활 곳곳에 스웨덴 특유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문화를 접하다 보니 현명한 소비,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필요한 물건, 내가 원하는 걸 산다는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닐뿐더러 죄책감이나 허탈함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 소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어떻게’, ‘무엇을’ 선택해서 소비하느냐에 대해 생각하고 물건을 사는 것, 내가 스웨덴에서 돌아보게 된 소비 개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나바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한창이었다. IMF 사태를 겪은 사람들이라면 모두 기억할 것이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너도나도 참여한 운동이었다. 한국의 재정 상황이 좋아지면서 아나바다 운동은 철 지난 촌스러운 단어가 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 날 스웨덴 제3의 도시 말뫼(Malmö) 시내를 걷는데 눈에 띄는 가게가 있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그냥 평범한 옷 가게 같은 ‘Swop Shop’. 그런데 이 가게는 특별한 철학을 가진 곳이었다. ‘Swop’이란 단어는 ‘바꾼다’는 뜻이다. 이 가게는 단어 뜻 그대로 물건을 ‘바꿀’ 수 있는 곳이었다. 입던 옷을 가져가면 점원이 상품의 값어치를 평가해 가격을 매기고 그에 상응하는 포인트를 적립해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포인트를 써서 다른 사람들이 내어놓은 상품을 살 수 있다.
여느 빈티지 숍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가게는 지속 가능한 의류 소비에 대한 철학을 품고 있었다. 스왑숍을 처음 연 제인 올슨(Jane Olsson)은 의류 제조에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환경적, 사회적 문제들에 반기를 들면서도 ‘더 이상 소비하지 말자’, ‘욕망을 억누르고 절제하라’고 말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여 지속 가능한 소비 패턴과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했다.
이렇게 옷을 교환하는 가게 말고도 다채로운 스타일의 옷들을 갖춰놓고 언제든 빌려 갈 수 있게 한 일명 ‘옷 도서관’이 스웨덴과 덴마크에 몇 군데 있다고 한다. 옷 도서관은 한국의 파티 의상 대여점과 비슷하지만,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일상복 또한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패스트패션 열풍을 이끄는 스웨덴 의류 브랜드 H&M에는 저렴한 옷이 많다. 중고 가게보다 가격이 싼 경우도 꽤 있다. 사람들은 보통 저렴한 가격, 유행하는 디자인의 옷을 사려고 이런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을 이용한다. 그렇지만 옷을 사지 않고 바꿔 입거나 빌려 입고 또 중고 가게를 이용한다는 것은 ‘싸게’ 구입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얘기다. '합리적인 소비'가 단지 ‘가장 싸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가진 우리에게 과연 ‘합리적인 소비’란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처음 스웨덴에 오고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 발품을 팔아 이곳저곳 돌아다녔었다. 그러다 동네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에 가게 됐다. 이 쇼핑센터에는 디자인이 특이하고 값도 싼 생활용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당장 필요한 걸 사야 했던 우리는 몇 가지 물건을 추려 구입했고 잘 샀다며 뿌듯해했다. 만족했던 마음도 잠시, 그렇게 급하게 물건을 샀던 걸 금방 후회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집 근처 중고 가게들을 들르면서였다. 거기에는 더 많은 종류, 더 좋은 품질의 물건들이 있었고 가격도 훨씬 더 저렴했다. 이 가게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은, 또 누군가의 손을 거쳐 더 높은 가치를 담게 된 가구나 식기들뿐만 아니라 오래된 엽서와 포스터 등 아주 작은 골동품들도 가득했다. 무엇이든 품질이 나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이곳에 전시되고 또 판매됐다. 스웨덴에서 중고의 개념은 ‘아직 쓸 수 있는 모든 물건’이었다. 중고 물건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다양한 형태로 판매되었다. 생활용품 중심의 중고 가게부터 빈티지 옷들을 무게를 재서 파는 빈티지 마켓, 한국의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까지 무궁무진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중고 시장 중 하나는 와인과 함께 하는 빈티지 쇼핑 콘셉트의 ‘Vinikilo’ 마켓이었다. 이 마켓은 한 곳에 고정된 장소를 기반으로 한 형태가 아니라 유럽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자유롭게 열리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마켓은 와인과 DJ, 음악과 빈티지가 어우러진 콘셉트로 진행되었다. 또한 퀄리티 좋은 중고 옷들을 저울에 달아서 kg당 가격을 매기는데 나는 이런 쇼핑은 처음이라 신기하고 즐거웠다. 이곳에서는 모든 중고 의류가 일정 이상의 ‘품질이 보장된다’는 전제 하에, 브랜드에 상관없이 오직 무게로만 가격이 매겨졌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브랜드나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 옷을 구매했다.
물론 중고 물품을 산다는 것은 남이 쓰던 물건을 사는 것이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스웨덴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되고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새것을 사는 대신 싸게 사고자 중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중고 거래를 일상적인 문화로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이 중고물품의 잠재적 소비자가 되고 중고시장의 이미지도 새롭게 변하고 있었다. 대형 마트와 같은 형태의 커다란 중고가게들이 많고 이를 찾는 소비자들도 많았다. 그동안 대안으로 생각되던 중고 물품이 이제는 최선책, 일상 속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합리적인 소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플리마켓’이다. 한국에서도 자주 갔었기에 익숙했고, 어디든 여행을 갈 때면 플리마켓이 열리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래서 스웨덴에 오고 난 후에도 주말마다 집 근처 플리마켓에 들렀다. 처음엔 플리마켓 규모가 꽤 커서 놀랐다. 그리고 도대체 이 작은 도시의 플리마켓에 어쩜 이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놓는 물건들은 정말 자기가 쓰던 것들이었고, 상업적인 목적으로 물건을 떼 오는 사람은 없었다. 또 눈에 띄었던 점은 어린아이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와 물건을 사러 오는 어린아이들은 물론, 직접 셀러가 되어 물건을 파는 아이들도 많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쓰던 물건을 직접 팔고 또 자신이 쓸 물건들을 고르고 옮기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언뜻 보면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비칠지 몰라도 아이들은 진지하고 신중했다. 이렇게 소비할 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험을 함으로써 아이들의 소비 개념이 단단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소유하는 게, 더 이상 엄마에게 떼를 써서 얻어내는 식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내놓은 물건의 값을 매기고 또 직접 물건을 사고팔면서 좀 더 넓은 의미의 소비를 배우는 것. 내가 쓰던 물건, 더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남에게는 돈을 내고 살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것. 꼭 새것을 사지 않아도 남과 바꿔 쓰고 나눠 쓸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일이 아이들의 가치관에 아주 큰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커다란 쇼핑몰과 휘황찬란하게 줄지어 있는 가게들, 새로운 디자인의 새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트렌드를 따라가라며 소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광고들, 이런 것들은 너무나 쉽게 닿는 거리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스웨덴에 살면서 느꼈던 건 스웨덴에는 그런 유혹들만큼 대안적인 소비 방식 또한 손 닿을 거리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안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새로운 방식의 소비를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 다양한 선택지가 생겼을테니 말이다.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때되면 뭔가를 사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 외의 선택지에도 눈길을 돌리면서, 나의 소비 습관을 천천히 만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