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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속가능 스튜디오 Nov 13. 2018

독립적인 개인,
아니 외로운 스웨덴인?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스웨덴 사회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스웨덴 병원에서 느낀 한국과 스웨덴의 차이점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스웨덴에서 맹장 수술을 받고 병원 신세를 질 일이 있었다. (아래 링크 참조)


걱정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절차나 병실 형태, 수술 과정은 한국과 거의 똑같았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 의사소통에 있어서 약간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그 외에 큰 차이점은 느끼지 못했다.

크게 다르지 않은 스웨덴 병원의 모습 (출처: Erik G Svensson/Scanpix Sweden)


한국과 스웨덴 병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수술이 모두 끝난 후 입원실에 있으면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의 병실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없었다. 

타국의 낯선 환경에서 맹장이 터져 놀랐을 남편과 함께 있어주려던 내 나름의 기특한 생각은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침대 옆에는 오래 앉아있기도 불편한 의자 하나만 놓여있었다. 


주변 환경을 둘러보니 환자 옆에서 밤을 보내기는 불가능해 보였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6명이 함께 쓰는 입원실에 배정을 받아 이틀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동안 그들을 방문한 보호자나 지인은 한 명도 없었다. 한국 병원의 다인실이 항시 손님들로 붐비는 걸 생각해볼 때 이 점이 한국과 스웨덴 병원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보였다. 


환자는 병실에 혼자 있었고 필요한 게 있으면 간호사나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있는 동안 아저씨 한 분이 퇴원을 하셨는데 짐을 혼자 챙기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야기를 해보니 병원에 있는 동안이나 퇴원은 혼자 하시지만 집에서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런 차이점을 인식하고 나니 입원실이 가득한 큰 병동 치고는 정말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객이 드물고 나처럼 환자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옆 침대에 새로 입원한 환자가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커튼이 쳐져있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의료진을 부르는 호출벨을 누르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상황이 지속되자 오지랖은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호출벨을 눌렀다. 간호사가 나타나자 아무래도 옆에 환자가 많이 아픈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간호사는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재빨리 조치를 취했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독립적이다 vs. 외롭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웨덴 사람들은 외롭구나, 아플 때 가족들이 왜 곁에 있어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사람들의 외로움을 강조하는 언론 보도들을 꽤 자주 접할 수 있다.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고르드(Lars Trägårdh)의 '스웨덴식 사랑 이론(Swedish theory of love)'을 타이틀로 가져온 에릭 간디니(Erik Gandini)의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북유럽 국가들은 행복지수가 무척 높은 반면, 개인당 항우울제 소비량도 가장 높다.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추구하면서 스웨덴에는 외로움이란 지독한 병이 퍼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에릭 간디니의 다큐멘터리 '스웨덴식 사랑 이론'의 포스터


*라르스 트래고르드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 (출처: 이상한 정상 가족, 김희경 지음)


라르스 트래고르드의 스웨덴식 사랑 이론과 에릭 간디니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 이 두 가지는 스웨덴 사회와 사람들의 독립성을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비추고 있다.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명확하게 이야기 힘들다. 스웨덴 성인의 40%가 지독한 외로움을 호소하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혼자 살아가며(1인 가구), 사회적 고립에 의한 조기 사망 위험성이 50%나 증가했다는 위협적 언론 보도들이 있는 반면 개인주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신뢰도가 높고 낯선 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는 응답이 50%가 넘는다는 글을 접하다 보면 스웨덴 사회의 모습을 단순하게 한 가지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는 둘 중 한 가지 의견에 더 크게 공감할 것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이구나' 혹은 '스웨덴 사람들은 외롭게 사는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 또한 내가 경험한 것을 위주로,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생각이 왔다 갔다 했었다.


주변 스웨덴 친구들의 대부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교육부 산하 학업지원위원회 CSN(centrala studiestödsnämnden)에서 학업 보조금이나 저금리 대출을 받아서 생활하는 친구들은 스웨덴 학생들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빚이 많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학비가 무료이고 저렴하게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스웨덴의 사회 시스템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특별한 '독립성 유전자'가 있어서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 터. 스웨덴 학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스스로' 또는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심지어 연습하기도 한다. 유치원 때부터 자기가 입을 옷을 고르는 것처럼 무엇이든 혼자 선택하는 것을 연습하고 그런 선택에 따른 시행착오를 직접 겪는다 (추운 날 원피스를 입고는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직접 체험한다든지). 일부 중학교에서는 대학생이 되면 어떻게 스스로 먹고살 것인지를 엑셀 파일로 직접 정리해보고 예산 계획까지 세워본다고 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이런 여러 가지 교육과 학습, 또 연습을 거치며 개인의 독립성을 꾸준하게 키워간다. 다만 독립적인 개인이 실패나 좌절을 겪을 때, 또는 혼자 할 수 없는 육아와 같은 일들에 부딪힐 때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타인이나 가족이 아닌 '사회'이다. 탄탄한 육아휴직 제도와 충분한 아동 보조금으로 결혼 이후에도 아이 양육 문제 때문에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고 당연히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남편이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식의 불평등도 줄어든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극히 줄어들게 된다.


나는 이렇게 내가 한국에서 자라며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의 독립성을 키우는 교육과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에 의존하는 그들의 복지 시스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이렇게 개인-개인 간의 관계보다 국가-개인 간의 관계를 중심에 둔 스웨덴 식 사회적 계약 방식을 '국가주의적 개인주의 (Statist Individualism)'라고 부르는데 이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차가운 신뢰 (Cool trust)'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출처: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지음)


높은 이혼율과 1인 가구 비율을 두고 '외로운 사회', '상호의존의 상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병실에서 혼자서 책을 읽고 밥을 먹고 퇴원을 위해 짐을 쌌던 입원실 이웃들을 보며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독립성과 편안함을 느꼈듯이 말이다.



조수영, 이성원 지음 <헤이스웨덴: 완벽하지 않지만 적당히 행복한 스웨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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