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는 원칙주의란
스웨덴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원칙을 정확히 알고, 또 지키는 것’이었다. 스웨덴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가장 놀랐던 것은 유럽권 친구들 대부분이 교칙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한국 학사 시절, 나의 대학 생활을 돌아보면 교칙을 알기는커녕 교칙이 있는지조차 몰랐다.(다들 나와 같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을 때 흥미로웠던 부분이 학생회에서 여러 학과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권리와 교칙에 관해 설명해주며 꼭 확인해보라고 말해주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입학 과정 중 하나였는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이 ‘이건 교칙에 어긋나는 것 같다’며 교수님과 학과 코디네이터에게 항의 메일을 보낸다거나, 학과 전체 회의를 만들어 교직원들과 함께 토론하기도 하는 등의 일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교칙에 ‘주말은 학사 일정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교수가 과제를 하는 시간에 주말도 포함해서 커리큘럼을 짰을 때 친구들은 교칙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즉각적으로 항의했었다.
한국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 참 피곤하게 산다’ 라거나 ‘뭘 그렇게까지…’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사실 처음엔 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따져야 하나, 그냥 후딱 해치우면 되지 않나, 서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말고 좋게 넘어가자 생각했다. 하지만 스웨덴에 온 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런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의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무리 작은 원칙이라도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작은 걸 어기기 시작하면 큰 것도 어기기 쉬워진다. 지킬 건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을 보면 학교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면서 규범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또 어겼을 때 불이익도 충분히 감수했다. 이들은 ‘이런 작은 규칙이야 어길 수도 있는 것 아냐?’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순간부터 모두가 영향을 받고 결국 원칙은 아무 쓸모가 없고 무의미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피곤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 원칙을 어기는 것에 대해 당당히 목소리를 낸다는 건 쉬워 보이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원칙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았느냐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사람을 봐가며 적용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같은 위법 행위를 했는데도 재벌 총수에게는 가벼운 처벌이, 소위 돈 없고 ‘빽’ 없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다 못해 익숙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누군가는 죄를 짓고도 감옥에서 특별대우를 받으며 지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런 얘기들이 자주 들려올수록 사회 정의는 어디에 있나, 법과 원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스웨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꼼꼼하다 못해 지나친 원칙주의에 대해 걱정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스웨덴 친구들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수년간 TV 수신료를 내지 않아 사임한 문화부 장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법인카드로 장을 보다 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정치인, 자녀 보육비 지급 신고를 빠뜨려서 낙마한 장관 후보자, 두 잔의 와인을 마시고 음주 운전 후 사임한 장관 등 사례는 다양했다. 친구 중 몇몇은 엄격한 원칙주의로 인해 많은 정치인이 사임하게 되면서 드는 사회적 비용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선거를 준비하고 투표를 진행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언제 어디에서든, 그게 누구든 원칙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스웨덴 사람들의 믿음 덕분에 지금처럼 스웨덴의 정치가 투명하고 신뢰가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이 과제를 하면서 마감기한을 지켜야 하고 수업을 들으며 수업 지침을 숙지해야 하듯이 교수와 교직원 또한 교칙을 따라야 했다. 법과 도덕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들이 시민들에게 비판받고 사임하듯 교수들 또한 교칙에 따르지 않았을 때 학생들의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수가 수업 가이드와 스케줄, 과제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던 경우뿐만 아니라 과제 제출 후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때 전달하지 않았던 때에도 어김없이 학생들의 항의를 받았다. 교수가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과제를 해야 하는 것이 학생의 의무라면 그 의무를 지킨 학생들에게 정확한 피드백을 주고 더 나은 학습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교수의 의무였다.
학생 개개인의 항의가 묵살되는 경우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교수에게서 대답을 받았고 여러 명의 의견이 모일 때는 학과 전체가 함께하는 피드백 세션이 열리기도 했다. 교수가 학생의 학문적 오류를 지적하고 성적으로 점수를 매기듯이 학생 또한 강의의 질과 과제의 짜임새에 대해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평등한 교수-학생의 관계가 보장되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학교에서의 이런 원칙은 표절 시비를 가릴 때 더 명확했다. 꼭 스웨덴이 아니더라도 학문을 연구하거나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출처 없는 자료, 근거 없는 주장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남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해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스웨덴에서는 표절에 대해 특히 더 민감한데, 나도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정보의 출처와 표절에 대해 워낙 철저하게, 또 반복해서 배우다 보니 나중에는 출처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고등학교에서도 졸업논문을 쓰기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정보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정보를 써야 할지, 어떻게 기존의 정보를 잘 이용해서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내고 그 문장들로 내 주장을 보강할지, 또 정확한 출처를 어떻게 기록하고 첨부하는지 배우면서 완성도 높은 논문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숱하게 써온 엉터리 발표 자료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이었다. 동시에 블로그에 스웨덴 유학 생활에 관해 글을 쓰면서 우리 부부의 글을 교묘하게 짜깁기해 올렸던 사람도 생각났다. 우리 또한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좋은 정보를 잘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시 출처 표기에 민감한 사람이 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원칙에 엄격하다고 믿게 되면 그 사회는 건강해지고 상호 신뢰도도 높아진다고들 한다. 서로 속고 속이는 사회, 대부분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남을 믿을 수가 없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스웨덴에 사기 사건이나 도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살던 도시에서도 좀도둑, 자전거 도둑이 있었고 작은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스웨덴 사회는 이런 범죄자들보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국보다 느 슨하게 표 검사를 하는 대중교통처럼 개인의 양심을 믿고 운영되는 공공 시스템, 셀프서비스로 운영되는 음식점과 카페들만 봐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 친구는 스키장에 갔다가 짐을 보관하는 로커는 없고 사람들이 개방된 공간에 놓인 선반 위에 짐을 두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선반 앞에는 지키는 사람도 없고 CCTV도 없어 당황했다고. 물론 보안 시스템, 로커, CCTV와 경비원의 존재가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믿지 못해 생기는 추가적인 비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 원칙을 만들고 공유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꾸만 작은 원칙, 중요하지 않은 원칙, 지키지 않아도 되는 원칙을 나 누고 따지고 있다. 나 스스로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100% 잘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이제 ‘원칙주의자’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