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노년과 그런 노년을 보장하는 사회
입학 직후 처음으로 'Swedishness - 스웨덴스러움이란 무엇일까?'라는 학교 세미나에 참석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연령대나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바로 옆 자리에 한 아주머니(혹은 할머니)가 앉으셨다. 세미나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는데 아주머니는 내게 어디에서 왔냐며 말을 거셨다. 나 또한 낯을 그리 가리는 편은 아니어서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름은 세실리아, 내가 다니고 있는 룬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 각국에서 일을 하다 나이가 들고 룬드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했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이 잘 통하고 재미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는 서로 번호를 교환했고 기회가 되면 피카(Fika: 스웨덴식 티타임)를 하기로 했다. 40년 전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다녔던 동문이라니 (내가 다닌 룬드대학교는 당시 350주년이었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과연 연락을 하게 될지, 정말 또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워낙 많지 않은가.
세미나가 있고 얼마 후, 세실리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남편을 데려가겠다고 이야기했고 우리 넷은 함께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았고 우리 또한 그들에 대해, 또 스웨덴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기에 대화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부모님과 친척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과 이렇게 길게, 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존칭을 쓰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니 스스럼이 없었고 내 얘기를 너무나 즐겁게 들어주니 이야기할 맛이 났던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스웨덴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내가 보는 스웨덴에 대해 궁금해했고 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 나이가 어리고 스웨덴에 산지 얼마 되지 않았던 우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롭게, 또 공감하며 들어주는 그들의 태도에서 일종의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그들의 조카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그 답례로 우리의 작은 원룸에 그들을 초대해 한국식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함께 카페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고 지역 축제에 함께 구경을 갔다. 세실리아와 닐스 부부는 궁금한 것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었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 화두를 던졌고 재미있는 행사가 생기면 우리에게 함께 가자고 서슴없이 제안했다. 때로는 그들의 친구를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그들의 친구들 또한 그들처럼 편안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나의 나이 차이는 아마도 서른다섯 살쯤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이차, 세대차로 인한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아까 말했듯 존칭이나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이 일단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나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는데, 내 경우에는 존칭이나 존댓말을 쓰게 되면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낀다(그러한 거리감이 필요할 때도 많지만). 두 번째는 그들의 태도인데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적다고 해서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렇다'나 '나 때는 그랬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며 '나도 그래!'라든지 '정말?', '그렇구나!'라며 공감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신나고 편안했다. 마지막으로는 그들의 관심사가 나와 겹치는 경우가 많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그들은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둘만의 여행을 자주 떠났고 우리 또한 유학생 부부로서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좋았던 여행지를 공유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들이 우리를 처음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 방문 전날 세실리아는 '혹시 못 먹는 음식이 있
니?'라며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채식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녀는 '알겠어!'라며 그녀가 무슨 음식을 준비할지 문자로 간단히 보내주었다. 그녀는 채소, 치즈 등의 채식 식단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우리는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노련하고 세심한 배려에 감사함을 느꼈고 엄청난 요리 실력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세실리아와 닐스, 그들과의 인연은 스웨덴 생활 내내 지속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나를 꼭 안아주며 꼭 우리를 보러 한국에 오겠노라 약속했다. 나는 첫 만남부터 끝까지 그들과의 관계가 다른 친구들과 다름없다 생각했고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들이 생긴 것에 새삼 기분이 묘해졌다.
스웨덴에 살며 세실리아와 닐스뿐 아니라 교수님들이나 이웃 노인들, 친구의 부모님 등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처럼 지낸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우리가 외국인이고 이곳에서는 영어로 소통하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내다 보니 그런 이유보다는 그들이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우리를 스스럼없이 대하고 먼저 다가와주었던 것이 그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나이나 지위, 직책에 따라 서열이 나뉘지 않는 회사, 학교 등 스웨덴 사회 전반의 문화, 노인들이 남들 보는 눈에 맞추어 '나이에 걸맞은' 옷차림이나 행동을 할 필요가 없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살만 어려도, 많아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고 나이에 걸맞은 옷차림과 행동, 격식을 요구받고 동시에 나이에 맞는 대우를 바라게 되는 우리 문화와는 너무나 달라 흥미롭기도, 또 신기하기도 했다. 그들이 '노인 존경'을 강조하는 동양의 문화가 가진 장점을 차용하고자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우리와 다른 그들의 문화에 대해 호기심과 호감을 가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목격한 스웨덴의 노년은 활기차기도, 여유롭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만국 공통 '건강'이 보장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기는 하겠지만. 스웨덴의 노년은 사회적으로 보장된다. 연금이 나오고 여러 가지 사회적 혜택들이 생긴다. 물론 이는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며 높은 세금을 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스웨덴의 노인 정책은 유럽에서도 높게 평가받는데, 그 이유는 노인 문제를 가족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보고 정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출처: 나승위, 스웨덴 일기). 이는 육아를 한 가족이 부담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시각이 아닌가 싶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을 가족이 부양하기보다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고 보았던 시각이 현재의 활기차고 당당한 스웨덴의 노년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시 축제를 가든, 학교 행사를 가든 어디서나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고 행사를 즐기는 노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앞에 나서 이야기를 주도하기도 하고 일어나서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한다. 특히 지난봄 축제 퍼레이드에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악기를 연주하고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고 신나게 행진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아, 나도 늙으면 여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노인들, 또 그런 노인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젊은 사람들, 그 모습은 내가 본 여러 모습들 중 가장 멋지고 조화로운 것이 아니었나 싶다.
노인들에게 꽤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이런 스웨덴 사회에서 살아가는 세실리아도 언젠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스웨덴 사회는 젊음의 가치를 아주 높게 여겨.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보다는 젊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한국처럼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도 없기 때문에 때로 노인들은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기도 해."
한국처럼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서로 간에 평등하기 때문에 마냥 좋다고 생각했던 스웨덴 문화가 되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문화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얻고 그들의 경험과 연륜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존댓말을 쓴다. 스웨덴에는 그런 문화가 없는 대신 서로 평등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의미로는 노인들의 말을 특별히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역시 어느 문화든 완벽하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웨덴 사회에서는 동양의 '노인공경문화'를 배워와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데, 젊음의 가치와 연륜의 가치를 동등하게, 또 서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우리 사회 또한 젊음의 가치만을 최고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느 순간부터 노년의 삶은 그저 우리 사회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있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