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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속가능 스튜디오 Dec 04. 2018

‘왜’라는 질문이 불편한가요?

원래, 항상, 그냥, 그런 것은 없다. 스웨덴에서 생각한 '왜'라는 질문


제가 이걸 왜 배워야 하죠? 

강의 시간에 전과 다른 특이한 과제를 받았다. 국립공원으로 현장학습을 다녀온 다음, 그곳에서 관찰했던 자연 풍광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일반적인 인간의 심리를 상상해보라는 의도로 주어진 과제였다. 시나 짧은 산문을 쓰면 되는 과제였기에 간단하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나 보다. 한 친구가 손을 들었다. “이 과제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죠? 제가 이 과제를 통해 새롭게 배우게 되는 건 뭔가요?” 간단한 과제라 빨리 끝낼 수 있겠다고 속으로 좋아했던 나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교수님이 이 과제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과제 설계에 있어 고려했던 것들, 이 과제를 통해 이루어야 할 학습적 목표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했고 나는 이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왜 이걸 배워야 하지?’, ‘이런 과제는 왜 내주는 걸까’를 깊이 생각해보거나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끊이지 않는 ‘왜’라는 질문

“그건 왜 그렇죠?”라는 질문이 불편할 수 있다. 도발하는 것처럼 들리거나 시비를 건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다수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에 의심을 품고 질문을 하면 피곤한 사람, 혹은 이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사람은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때도 있고 말이다. 한국의 여러 조직이 그런 것처럼 보수적인 곳일수록 ‘왜’라는 질문은 더욱 금기시되었다. ‘원래’ 그랬던 것, ‘항상’ 그래왔던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대답은 결국 ‘원래부터 항상 그랬으니 넌 그냥 거기에 따르면 돼’ 정도이다. 정말 왜 그런지 궁금해서 묻는 말이든 왜 그런지 답답해서 화를 내는 표현이든 권위에 대한 도전과 관습에 반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왜’라는 질문이 불편했다. 스웨덴에 오고 ‘왜’라는 질문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노이로제를 겪을 정도였다. 누군가 한국에 관해 물어볼 때 가볍게 “한국에선 이러이러했어”라고 답하고 나면 항상 “왜 그런 거야?”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30년 넘게 살아온 내 나라에선 별생각 없이 당연했던 것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니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말과 행동들,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왜 그런 건지’ 자꾸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답을 찾을 때도 있었고 도무지 왜 그런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또한 모든 행동과 상황들이 ‘왜’ 그런지에 대해 골몰하다 보니 세상엔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에 살며 한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한국 대통령은 왜 탄핵당한 거야?”였다. 어떤 대답을 해도 “그건 또 왜?”, “그게 어떻게?” 등의 추가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이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한국이란 나라의 역사와 정치구조, 사회의식까지 두루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근본적으로 나는 내가 평생 살았던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내가 알고 있는 게 진짜 맞나 등 여러 가지로 느낀 바가 많았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불편함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동시에 ‘왜’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더 알고 싶게 만드는 힘이 되고 있었다.


어릴 때는 끝도 없이 해대던 '왜?'라는 질문, 우리는 언제부터 '왜?'라고 묻지 않게 되었을까


프로불편러의 탄생

인터넷 유행어 중 하나인 프로불편러(pro+불편+er).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이런 말이 다 있나 싶으면서도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전문적으로 불편한 사람이라니, 어떤 기준인지 모호하지만 아마도 스웨덴 사람 중에는 우리가 말하는 '프로불편러'가 많지 않을까 싶었다.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는 스웨덴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 가치에서 벗어나는 상황들에 대해 주저 없이 비판한다. 그들은 또한 친구나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말 한마디를 할 때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듯했다. 친구들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였다. 자신의 의견을 일목요연하게 말하면서도 그것을 절대 일반화시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 이런 그들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거리감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반대로 섬세한 배려에 감동을 한 일도 많았다.


내 생각에 프로불편러란 어떤 현상이나 상황이 ‘불편하다’ 느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함을 표현하고 ‘왜 내가 불편했는지’, ‘그런 불편한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까지 생각해보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과 행동을 무의식 중에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대로 생각해보는 사람이다.

이런 기준에서 스웨덴에서 만난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프로불편러였다.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즉각 손을 들어 이야기하고 ‘그건 대체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학교 수업을 들을 때 이런 모습은 더 강했다.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열심히 필기만 하기보다 ‘왜 그런지’,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배경을 의심했다.

가끔 교수님이 '질문 좀 그만하면 안될까, 수업해야 하는데'라고 말할 정도였다 



답은 없지만 답을 찾아서

‘왜’로 시작하는 대화는 대체로 정답이 없다. 학생들이 ‘우린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수학을 배워야만 하는지’ 묻는다면 교사 나름의 대답을 내놓으며 설득하려 하겠지만 그 대답에 모든 학생이 설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답이 없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질문하는 토론 문화가 스웨덴 사회의 기본 모습이다.

그렇다면 답이 없는 토론은 토론으로서 끝나게 되는 것일까? 스웨덴 사회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으로 언급되는 합의 문화가 그 답을 말해준다. 스웨덴 정치를 보자면, 나라 전체적으로 중요한 정책을 합의하는 데에 5년에서 1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결정을 미루는 합의 문화 때문이었다. 이때 토론은 전체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 해당하는데 다수결로 간단하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의견을 하나하나 들어보고 의견을 모아가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비슷한 종류의 팀 과제를 받아 한 번은 스웨덴 친구들과, 한 번은 다른 나라 친구들과 한 적이 있었다. 비슷한 과제인데도 스웨덴 친구들과 할 때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과제 내용을 모두가 이해했는지 서로서로 확인하고, 각자의 의견도 들어보고, 이견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조율해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던 것이다. 그에 반해, 다른 나라 친구들과 과제를 했을 때에는 시작부터 각자 파트를 나눠서 한 부분씩 도맡아 했고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다 보니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과제를 하면서는 파트를 나누어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제 발표가 끝나고 교수님과의 질문, 답변 시간에 문득 내가 이 과제를 통해 배운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부분에 대해서는 막힘 없이 답할 수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이 맡았던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보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하며 과연 시간상으로 ‘빨리’ 하는 것만이 효율적인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작은 문제라도 소수가 결정하기보다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동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길어지는 회의, 결론 없는 토론을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속전속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또 빠른 결단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빠른 결단, 속전속결이 불러오는 부작용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결정하는 데는 느려지지만 빨리 결정하다가 나타나는 부작용과 그것을 수습하는 시간까지 따지면 아예 처음부터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고 다양한 결과를 예상해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원래, 항상, 그냥, 그런 것이 아닌. '그건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다



조수영, 이성원 지음 <헤이스웨덴: 완벽하지 않지만 적당히 행복한 스웨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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