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는 부모를 닮지 않은 유전자로 인한 무수한 의심의 눈초리 그리고 듣기만 해도 살벌한 책략을 통한 유전자 검사 등등이 난무한다.
내 아들들 또한 부모를 똑 닮아 가끔 뒤돌아 앉아있는 아들의 뒤통수에서 헤어진 전남편의 모습일 보여 나도 몰래 화들짝 놀라기 까지도 한다. 별로 말이 없는 대신 한번 입을 열면 지독한 독설로 사람 눈물 빼는 하지만 걷는 모양새는 세상 어여쁜 여염집 여자 같은 걸음걸이. 날 빼닮은 큰아들이다. 이에 반해, 키는 건장한 어른 반토막도 안 되는 수준에 걸음걸이는 세상 대감마님 걸음걸이요, 만사에 재미난 것과 흥이 나면 누구도 못 말리는 작은 아들은 지 아빠 뺴박이다.
큰아들이 섬섬옥수 손가락인데 비해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건 친가 쪽이고, 목이 쭉 빠지고 미각에 유난스럽게 민감한 건 날 닮아서이다. 정리를 안 하고 백만 년 동안 두어도 스트레스 안 받는 둘째의 낙천적인 성격은 아빠를 닮은 것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깔끔 떠는 것은 희한하게 날 닮았다.
친정엄마를 닮아 다른 건 몰라도 청소를 안 하는 것을 거의 범죄에 가깝게 대하는 나는 힘이 넘쳤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허깨비 수준이다. 지금도 세면대 거울에 물 튀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긴 하지만, 이젠 에너지 고갈을 명분으로 몇 주 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정도 수준으로 나도 많이 변했다.
이사를 한지 벌써 몇 달째. 방문을 닫아버리고 들여다보지 않는 아들의 방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먼저 살던 집에서 하루에 단 몇 개의 박스를 닫는 게 고작이었던 아들의 짐 대부분은 풀러 지지 않고 박스채 보관 중이다. 첫 번째 이유는 본인의 방이 좁아 모두 꺼내 놓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 집에서 짧게 살 것이기에 다시 이사 갈 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예 풀러 꺼내지 않는다는 것.
아들도 알고 나도 아는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 2년 동안 꺼내보지 않은 물품이나 입지 않은 옷은 처리하는 게 상식. 나도 잘 지키지 못하는 처지이긴 한데, 아들에게 2년 동안이란 시간은 아들이 보관하는 물품들의 가치를 오히려 상승시키는 기간이란다.
왜냐… 가지고 있는 물품들이란 것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피겨, 핫딜 자동차 컬렉션, 보물급 LP 판들 그리고 기계들을 언급하자면,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베타 비디어 플레이어, 게임기라는 게 처음 출시되었던 시조 격인 게임보이와 닌텐도를 포함 온갖 게임기들. 누가 썼었는지도 알 수 없는 오래된 라이카 카메라. 얼마 전엔 친구가 사는 동네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 집에서 내놓은 LP 플레이어를 얻어왔다. 아이들을 처음 낳았을 때 장만했던 대포 수준 크기의 캠코더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골동품(적어도 내겐), 엄마가 출장 시 선물로 사다준 기념품을 포함 잡스런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 그 모든 것들이 죄다 박스에 고이 담겨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누차 언급했다시피, 지금의 새집에는 그런 물건들을 꺼내놓을 만한 공간이 없다.
전에 살던 집에는 없던 차고가 있어 그나마 내 아웃도어 장비는 서울에 있는 친정집 방문 때만 필요한 거대캐리어등을 보관할 수 있다. 아들의 많은 박스들은 차고로 자리를 잡았지만, 습기나 벌레에 취약한 것들은 하는 수 없이 집안으로 들였다.
비좁은 안방도 본인 방도 넣을 곳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제3의 방에 박스들을 겹겹히 들여놓았다. 그중에서도 본인 방으로 들여야 할 물건들이 많다고 분명히 말은 했건만,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나도 박스들은 요지부동. 작은 제 3의 방도 큰아들이 와서 잘 수도 있기에 나름 공간이 필요하니 별수 없이 2층 복도에 줄이어 박스를 보관해 왔다.
몇 달이 지나는 시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있어야 아들이 없는 하루를 틈타, 박스들을 아들방 옷장 안에 몽땅 집어넣어 버렸다. 아들 옷 대부분은 본인이 애장(ㅎ)하는 드레서( 이 드레서도 아들을 낳았을 때 장만한 것인데 여태껏 못 버리게 하고 쓰고 있다) 안에 집어넣기에 아들방 옷장은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으니까 잘됐다 싶었다. 집에 돌아와 텅 빈 복도를 보더니 본인도 만족스러워한다.
차고 넘치는 박스가 여전히 눈에 거슬리지만, 방법이 있겠는가?
아들이 따로 살림을 내서 혼자 살게 될 일도 요원하고 나 또한 나이 들어가다 보니, 요즘은 혼자 사는 것보단 틈틈이 다퉈가면서도 의지할 수 있는 아들이 듬직하단 생각도 하곤 한다. 세상 무서울 것 없었던 마징가 아줌마도 나이 드니 별수 없나 보다.
며칠 전 샤워를 하다가 실수로 바닥에 비누를 떨어트렸다.
“퉁 ~~” 곧이어 들리는 아들의 목소리.
“ 엄마, 괜찮아요?”
“ 아~, 문제없어, 땡큐!! 아들”
늙다리 마징가 아줌마에게도 충심과 진심으로 무장한 어씨가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