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뼈가 굵고 장골인 함 씨 일가의 피가 섞인 엄니를 닮아 힘도 세고 인내력도 있다고 살아왔다 지금까지. 그런데 요즘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달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릴 적 엄니가 기도원을 가시던가 해서 며칠 집을 비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엄니가 이래라저래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다섯 살 아래 동생과 연년생 막냇동생을 마치 조카들처럼 보살폈던 것 같다. 엄니가 밑반찬을 해놓으시고 가시기는 했지만, 동생들의 밥상을 차리고 어설픈 솜씨로 된장찌개도 끓이고 아침저녁 씻는 것까지 잔소리해가면서 동생들을 챙겼었다. 그리고 엄니가 돌아오시는 날 아침이면 몇 시간에 걸쳐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할 수 있는 만큼 해서 널어놓고 엄니가 돌아오면 칭찬받을 예상에 들뜬마음이 되곤 했었다.
하지만, 돌아오신 엄니가 그다지 좋아했던 기억이 없다. 늘 엄니가 했던 말.
“ 너 이렇게 쓸고 닦고 이런 것 너무 열심히 하면 나중에 남편복 없어서 죽도록 일만 한다. 대충대충 해!!”
그땐 칭찬대신 쓴소리 내뱉는 엄니의 마음을 천만분지 일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백년이 지나 지금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엄니 말에 일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첫째로는, 엄니 본인의 운명적 부지런함이 천성이라기 보단, 가진 것 없고 허구 한날 집안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아버지의 직업상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쓸고 닦고 했어야 했던 본인의 삶을 반추하는 대사였을 듯. 나름, 있는 집 막내딸로 손에 물도 안 묻히고 하고 싶은 거 하나도 빼지 않고 다 하면서 살았던 복순여사가 어쩌다 가난한 남자의 아내로 살다 보니 삯바느질로 관절염에 시달리는 고달픈 인생 된 것에 대한 회한이 섞인 대사였다고 본다. 둘째로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해 키우는 큰딸이 조금은 본인보다 나은 삶을, 최소한 손에 물 많이 묻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정도 만의 풍족한 삶을 기원하고 싶은 엄니의 마음. 그런 것이려니 생각이 이제야 든다.
때늦은 철이 이제야 들면 뭐 하리.
똑같이 밖에 나가 돈 벌어 오는 전남편이 샤워하는 동안 오늘 입을 옷가지를 침대에 가지런히 놓아두는 것을 시작으로, 아들들이 오밤중에 깨어 울 때 단 한 번도 그의 단잠을 꺠운적은 없다. 빨래를 대신해 준 적도 없고 심지어는 오랜만의 혼자만의 여행으로 해외로 나갔을 때도 전화해서 쓰레기통 내놓는 날을 리마인드 하곤 했다. 전날 밤늦은 시각까지의 회식 후에도 쓰린 속을 부여잡고 아이들 도시락을 쌌고, 감기에 걸려도 하루 이상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던 적은 없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다. 몇 년간 함께 살던 시부모님이 잔소리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릴 적 엄니가 했던 것을 보아서 나도 모르게 습득이 된 것이고, 그냥… 정말 그냥 나도 모르게 그리되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전남편이 나서서 해줬더라면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무궁무진함을 기억하게 된다. 헤어진 전남편을 굳이 이제 와서 뒷담 할 만큼 켜켜이 쌓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엉덩이 가벼운 내가 일어서기 전에 쓰레기통을 버려주었다면, 아픈 내 몸을 억지로 일으키기 전에 미리 아들들하고 햄버거라도 사 먹는 배려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아침마다 이불정리만이라도 아니, 신었던 양말 한 짝이라도 제대로 빨래 바구니에 던져 주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엄니를 닮은 현모양처 코스프레는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혼자 꾸역꾸역 해내고, 혼자 끙끙대며 해결하고, 혼자 우직하게 지켜내다 보니 주변에선 나를 마징가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고 김자옥 배우님처럼 프릴 달린 파스텔톤 칼라의 블라우스와 화사한 플레어 스커트롤 차려입은 공주님같이, 또는 얇고 가녀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호.. 살포시 웃으며 우아하고 품위 있는 중년이고 싶었다. 하지만, 억세게 회사에서 내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씩씩거리고, 월급 인상이 함께 기대되는 승진을 위해 눈치를 팔다 보니 수십 년. 그렇게 나의 겉모습은 마징가 아줌마 싱크로율을 높여가기만 했었던 것이다.
태생적이라기 보단, 운명적 캐릭터이다 이건.
하지만, 환갑을 넘고 회사에선 제 아무리 큰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늙다리 취급을 받는 그래서 혹시 퇴사라도 당할까 하루하루를 노심초사하며 지내는 소심쟁이가 되다 보니, 운명적 캐릭터로 무장한 마징가 아줌마도 퇴역이 멀지 않음을 실감한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화되고 몸도 약해져서 병원신세까지 지고하다 보니, 마징가 아줌마란 단어가 무색하게 쪼그라진 내 모습에 나도 놀라게 된다.
받아들이자. 얌전한 마징가 아줌마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이리 몸이 성치 않으니 보약이라도 한재 사 먹어야겠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보약을 먹고 나면 충전되는 건가 혹시? 요즘은 재충전 배터리가 대세인데, 나도 다시 재충전된 마징가 아줌마로 거늡날 수 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