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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an 14. 2019

좋은 문장 내 것으로 만들기

용기와 위로를 주던 조언들


대학 방송국에서 활동하면서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

 

방송 글을 쓰겠다는 꿈을 품었지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90년대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조금은 생소했고, 지금처럼 선배들의 친절한 안내가 담긴 작법서가 시중에 잘 있지도 않았다. 방송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는 신기루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저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은 더 커졌다.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방송작가는커녕, 그 무엇도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매일 학교 도서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도착하면 간행물실부터 찾았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신문의 문화면이거나 TV 혹은 영화 관련 잡지들을 읽었다. 기사 중 방송 프로그램 소개나 제작기, 연출가나 작가의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스크랩을 해서 보고 또 보았다. 지나가다 우연히 나를 발견한 동기나 선후배들은 나의 공부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도서관에 와서 놀기만 한다며 대놓고 비웃던 친구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심심풀이로 읽던 기사들이 나에게는 방송작가 수험서이자 글쓰기를 위한 필수 교재였다.    


그러던 중 몇 년 전 신문에서 한 방송작가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를 찾았다. 잡지에서는 또 다른 작가가 그녀를 추모하여 쓴 글도 발견했다. 현재까지도 휴먼 다큐멘터리의 교과서로 불리는 MBC 「인간 시대」의 고(故) 박명성 작가였다. 「인간 시대」는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 엄마와 함께 꼬박꼬박 챙겨보던 프로그램이었다.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어 때론 감동에, 때론 안타까움에 눈물짓게 했던 방송이었다.     


특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편을 보며 중학생이던 나와 엄마가 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있다. 스웨덴 입양아 신유숙 씨를 통해 입양의 아픔을 그렸던 이 다큐멘터리는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평범한 이웃의 사연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견했던 「인간 시대」는 10년 동안 거의 모든 내용을 박명성 작가가 집필했다고 한다. 나중에 선배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까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고 한다. 그날도 밤을 새우며 방송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을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갑자기 쓰러진 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고 외치기만 했지 왜 방송 글을 쓰려고 하는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했던 나는, 고(故) 박명성 작가가 남긴 인터뷰 기사에서 꿈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기자가 그녀에게 내레이션을 쓰는 데 세세한 정성을 쏟아붓는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장 큰 보람이며 한 달에 서너 편 집필해야 하는 고역을 기꺼이 감수하게 되는 것도 저를 포함한 모든 시청자가 「인간 시대」를 보고 한층 우리네 삶을 이해해줄 수 있기 때문이죠.” (중략)    
과대 포장에 의한 상투적이고 자극적인 묘사는 오히려 식상하기 쉽고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채규진 기자, 'M-TV <인간시대> 방송작가 박명성 씨', 중앙일보, 1991.4.4)


글쓰기는 자신의 글 솜씨를 자랑하는 장이 아니며 그렇다고 작품 주인공을 과하게 꾸미거나 허황되게 묘사해서도 안 된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담백하지만 진실된 글을 쓰라.’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지만,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선배가 다독이며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그때 만난 문장은 지금까지 가슴에 남아 새 글을 구상하거나 다 쓴 글을 재단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기준이 되고 있다.    


선배의 말이 작가를 꿈꾸던 내게 좋은 글에 대한 가치관을 심어줬다면, 방송작가가 된 후에는 책 한권이 글쓰기 태도를 다잡아주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워낙 유명해서 수식어가 따로 필요 없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이다. 500여 편의 소설을 남기며 최고의 작가로 불리는 저자는 글이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자신의 일화를 곁들여 유쾌한 목소리로 비법을 들려준다. 성공한 작가의 글쓰기 철학과 그의 성장 과정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이 왜 필독서가 되었고 왜 세월이 지나도 인기가 여전한지는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중 내 마음을 처음 두드린 문장은 이것이었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방송작가가 공들여 준비한 방송이 전파를 타고나면 그때부터는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가령 맛집이나 건강 정보를 전하는 교양 프로그램 작가들은 사무실 전화기 앞을 떠날 수가 없다. 요즘은 인터넷 이용자가 늘어 프로그램 게시판을 통해 관련 정보나 전화번호를 검색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여전히 직접 제작팀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하는 분들의 수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방송 후 맞춤법이나 호칭을 잘못 사용했다고 충고와 질책을 보내는 시청자의 전화도 받아야 한다.     


초보 방송작가였을 때, 이 전화들을 응대하는 것이 참 곤욕스러웠다. 내가 만든 작품을 봐주었다는 고마움보다는 ‘TV를 왜 이리 꼼꼼히 보는 걸까’,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면 될 것을 굳이 전화하는 이유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즈음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앞서 소개한 구절을 만났다. 학생이던 스티븐 킹이 주간 신문의 편집장에게 처음 쓴 기사를 보여준 후 들은 말이었다. 풀이하면, 자기가 할 이야기의 내용을 최대한 올바르게 쓰고 그 후에는 글에 대한 어떤 반응이나 비판은 모두 독자의 몫이므로 작가는 그 평가를 막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방송도 다르지 않다. 완성하기 전에는 제작진의 창작물이지만, TV나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순간부터는 모두가 공유하는 작품이 된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문을 닫고 몰입하여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글이 세상에 공개한 후에는 칭찬이든, 비판이든 마음의 문을 열어 수용해야 한다. 시청자의 관심과 조언이 없는 프로그램은 그만큼 세상으로 널리 퍼지지 못한 작품일 테니까 말이다.     


이 책에는 방송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솜씨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소설의 목표’를 ‘방송의 목표’로 고쳐 읽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래서 수첩 맨 앞장에 이 글귀를 옮겨 놓고 수첩을 펼칠 때마다 곱씹어 보기도 했다. 방송을 보는 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가 만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근사한 일이었다. 방송 글쓰기로 시청자를 유혹하고 감동까지 주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방송작가들이 고단함이 밀려와도 키보드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부족한 나의 글 앞에서 고민하고 흔들릴 때마다 힘을 주던 문장들이 있다. 글을 쓰는 일이 여전히 두렵고, 매일 글과 함께하는 작가의 삶을 살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이 들 때마다 이 문장들을 곁에 두고 주문처럼 읽었다. 마음속으로 몇 번씩 되뇌다 보면 어느새 다시 펜을 들 용기를, 키보드 앞에 앉을 용기를 주던 위로의 문장들. 내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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