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어째, 딸이 없어요?
지하철을 탔는데 나란히 앉은 두 할머니의 대화가 귀에 와서 꽂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난 듯한 어르신들은 옷깃만 스쳤을 뿐인데 절친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요?”
“병원이요. 고혈압약 받으러 갔다 와요.”
“아까 탈 때 보니까 다리도 불편해 보이시던데?”
“무릎이 좀 안 좋아서 안 그래도 수술해야 돼요.”
“아이고, 요즘 코로나 때문에 병원도 위험한데 혼자 다니시네. 딸 있어요?”
응? 거기까지 듣다가 대화 내용이 왜 갑자기 자녀 이야기로 튀나 싶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통계청 조사원보다 더 자세한 호구조사 아닌가. 듣지 않는 척 눈은 책에 두고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병원에 다녀온다는 어르신은 나의 의구심이 무색하게 자기 가족의 실태를 술술 읊었다.
“딸은 없고 아들만 둘 있어요. 하나는 서울 살고, 하나는 가까이에 살아요.”
“에이,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딸이 있으면 다리 불편한 엄마를 혼자 병원에 잘 안 보내지.”
이쯤 되니 대답을 순순히 하던 할머니의 심기가 약간 불편해졌는지 발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평소에는 우리 아들이랑 며느리가 잘 데리고 다녀요. 오늘은 내가 약 떨어진 걸 깜빡해서 혼자 다녀온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딸만 못하지. 우리처럼 늙은이들한테는 딸이 있어야 한다니까. 병원 가봐요, 딸이 데려온 노인은 있어도 며느리가 데려온 노인은 없어. 인터넷으로 뭐 사달라고 하기에도 딸이 편하고, 딸은 하나 있어야 해. 아이고, 난 요즘 딸 없는 할머니들이 제일 안 됐어.”
딸이 없다는 할머니는 순식간에 불쌍한 사람으로 전락했다. 그 순간 일면식도 없는 또래 노인에게 동정을 받게 된 할머니보다 나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아들이나 며느리의 보살핌은 못 미덥다고, 딸의 돌봄과 부양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른들의 믿음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딸이 있는 것이 분명한, 그래서 의기양양 오지랖을 부리는 어르신의 딸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 역시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자신이 딸이어서 다행이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많은 가족 중 왜 자신만이 이런 책임을 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느끼고 있진 않을까. 그러다가 혹여 지치고 힘들 때 나이 든 부모에게 짜증을 내거나 다른 형제, 자매에게 힘듦을 토로했다가 돌아서 죄책감에 눈물짓고 있진 않는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K-장녀’란 말이 있다. 나는 이 신조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문 기사에서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나의 정체성을 이 말 하나로 옭아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사에서 정의한 바에 따르면, 나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K장녀’였기 때문이다.
‘K-장녀’란 온라인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말로, 한국(korea)과 장녀를 합성한 것이다. 가정에서 책임감을 강요받는 장녀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연예인 중에서도 부모를 위해 희생하거나 동생들을 알뜰살뜰 살리는 캐릭터에게 칭찬하는 듯이 이 단어를 쓴다.
과연 한국의 딸들에게 이 단어가 칭찬의 의미로 다가올까? 돌봄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이 있다면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에서 벗어나거나 도망가지 말라는 올가미가 되어 딸들의 인생을 꽁꽁 묶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라고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7년에 이미 고령사회가 되었고, 오는 2026년이 되면 노인 인구가 20%를 넘겨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라 전망한다.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인 사회에서 돌봄의 문제는 분명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이슈이다. 가족 내에서 돌봄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거나, 돌봄 노동에 최적화된 구성원은 딸이라고 믿는 인식에 대해 이제는 관점을 달리할 때가 되었다.
그 출발점에서 ‘K-장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나부터 이제 바뀌려 한다. 혼자 엄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른 가족에게는 짐을 나눠주지 않겠다며 종종거렸던 지난날을 반성하겠다. 이제는 엄마의 딸에 대한 편애와 집착을 그러려니 하지 않고, 주위에서 장녀에게 향하는 부담스러운 시선과 태도를 바꾸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할 것이다.
어느 가정에서든 돌봄이 한 사람만의 몫이 되지 않도록, 힘들 때 사회에 편히 손 내밀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도록 사회복지의 변화를 주장할 것이다. 그래야 딸이 없는 내가 노년기를 맞이했을 때 불안에 떨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을 다닐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