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새겨진 서사
나의 얼굴에는 1.5 센티미터 가량의 흉터가 숨어 있다. 오른쪽 눈꼬리가 끝나는 지점에 가로로 선을 그은 듯 자리한 흉터다.
눈가 흉터는 내 나이 일곱 살 때 생겼다. 서울에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고 도망치듯 부산으로 내려온 우리 가족이 한옥 형태의 집에 세 들어 살던 때였다. 집 구조가 특이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중간에 넓은 마당과 우물이 있었고 각 세대 방문 앞으로 툇마루들이 이어져 있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방들 중 한 칸이 우리 네 식구의 보금자리였고, 내 또래 아이들을 둔 여러 세대가 셋방살이를 했다.
거대한 한옥집 안에 모여 살던 아이들에게 마당과 툇마루는 놀이터 역할을 했다. 그날도 친구들과 우물에서 툇마루까지 작은 돌을 누가 빨리 옮기나를 시합하던 중이었다. 어릴 때는 왜 같은 구간을 반복해 왔다 갔다 하는 바보 같은 놀이에도 까르르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일까. 또래 중 키가 작고 체력이 약했던 나는 친구들을 한 번이라도 이겨보겠노라고 눈을 감고 전력 질주했고, 마당에 박혀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툇마루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혔다.
신기하게도 그날 병원에서 눈을 꿰매던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눈 옆에서 피가 흐르니 놀란 엄마는 안과로 나를 업고 뛰었고, 의사 선생님은 눈을 살짝 비켜서 찢어졌다며 천운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너무 놀라면 몸의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곱 살 때 체험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던 병원 천장과 눈가를 꿰매며 실을 자를 때 들리던 사각 하는 가위질 소리, 얼굴과 손에 묻어있던 빨간 피의 이미지를 중년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눈꼬리를 따라 마스카라를 그렸던 20대 때는 흉터가 도드라져 보였는지 알아보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흉터를 발견하면 마치 불량품 검수 자라도 된 듯, “어머, 눈 옆에 흉터 있네! 제법 큰데?”를 외치던 이도 있었다. “성형외과 안 가봤어? 아가씨가 얼굴 흉터를 왜 그냥 둬?”라며 질책하듯 묻는 말에 응대하느라 피곤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흉터를 그대로 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나의 흉터가 그리 밉지 않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리며 병원 침대에 누워 눈을 꿰매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굳이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다. 상처를 꿰매는 동안 내 손을 아플 정도로 꼭 잡고 있었던 엄마 손의 체온, 아플 텐데 울지도 않고 잘 참는다며 칭찬해주던 의사 선생님의 중저음 목소리, 미스코리아 내보내려고 했는데 이제 어쩌냐며 속상해 눈물을 글썽이던 아빠의 눈동자까지...... 이 흉터를 없애면 그날 그때의 감정과 추억들마저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달까.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눈가에 웃음 주름이 생기니 주름골을 따라 흉터가 감춰지고 옅어지며 아는 체하는 사람이 적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 거울 앞에서 눈썹을 그릴 때마다 내 흉터가 안녕함을 확인한다. 눈썹을 그릴 때 흉터가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펜슬로 눈썹을 그리는데 매일 그 모양과 길이가 제각각이다가 어느 날 문득, 흉터가 끝나는 지점까지 눈썹을 그리면 내 마음에 드는 눈썹 모양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흉터가 좋은 점은 무궁무진하다. 그중에 제일은 흉터 하나만 건드리면 이야깃거리가 줄줄 흘러나온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나만의 서사처럼.
몇 년 전 엄마는 폐 수술을 했다. 우연히 촬영한 CT상에서 폐에 암이 퍼져있는 것처럼 보였고 의사에게서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일지 모른다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들었다. 수술을 해봐야 손 쓸 수 있는 상태인지 정확히 알 것 같다던 의료진의 이야기에 입원 날짜를 잡고 돌아오던 길, 버스 안에서 난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예정된 수술 시간을 훌쩍 넘겨 엄마는 한밤 중에 수술실에서 나왔다. 얼굴이 환자만큼 하얗게 질려 나온 의사는 염증이 심하게 유착되어 있어 암으로 보인 것 같다며 암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난처한 얼굴로 전했다.
나와 가족들은 “선생님, 암이 아니면 됐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쳤다. 암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오른쪽 폐의 절반을 잘라내야 했고,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폐 수술로 엄마의 등에는 길고 굵은 흉터가 생겼다. 하얗고 뽀얀 엄마의 살결은 흉터를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엄마와 긴 입원 생활을 마치고 대중목욕탕에 갔다. 엄마를 먼저 탕으로 보내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머리를 말리던 아주머니들이 수군대기 하기 시작했다.
“방금 들어간 아줌마 봤나? 아이고, 흉측해라. 등에 저렇게 큰 흉터가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나? 나 같으면 대중목욕탕에 못 오겠는데. ”
“그러게. 징그럽다, 야! 근데 무슨 수술을 했나? 뭐 저렇게 흉터가 크노?”
겨울에 옷을 벗어서인지, 아주머니들의 대화에 화가 나서인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도 발가벗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가 참자며 숨을 골랐다. 억울한 마음은 독백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엄마의 등에 난 흉터는 저희 가족에게는 훈장이나 다름없거든요. 저 흉터 보며 수술실에 혼자 누워 있었던 엄마를 상상하고, 저 흉터에 약 발라주며 이만하길 다행이다라고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고요. 생사의 고비를 넘긴 엄마와 저희 가족이 그날을 잊지 않고 살라고 새겨진 역사의 증표랍니다.”
나도, 엄마도 매끈한 얼굴과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분명 남들 보기엔 좋았을 듯싶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몸에 흉터 하나 가지지 않은 인생이라면, 몸의 서사가 그만큼 빈약하다는 뜻은 아닐는지.
영화 <암살> 속 이정재 배우도 자랑스럽게 배의 흉터를 내밀며 외치지 않았던가.
“여기 총알 자국이 보이시지요!”
흉터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을 변호할 기회도,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평온한 지금을 감사할 기회도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