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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Apr 26. 2022

필라테스 하는 할머니

내가 그리는 노년의 모습


상가를 지나던  복도에 붙은 사진  장에 눈길이 갔다. 사진  인물이 매끈하고 탄력 있는 피부와 근육을 가진 젊은 몸을 뽐내고 있었다면 그저 광고 사진이라며 가던 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사진은 색감을 잃은 흑백이었고  속에는 백발의 남성이 엉덩이만을 지면에 닿은  팔과 다리를 공중으로 곧게 뻗고 있었다. 사진  노인은 말하는 듯했다. 등이 굽고 피부가 처지는 노쇠한 몸이라도 나만의 중심을 잡아 나간다면 세월의 변화에 무너지지 않을  있다.


‘그래, 저 나이까지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이라면 꽤 괜찮지 않을까?’


필라테스를 만나게 된 계기는 즉흥적이고 단순했다. 그때의 나조차 이 운동을 4년 넘게 지속할 줄 몰랐고, 내 삶에서 글쓰기와 책 읽기 다음으로 중요한 행위가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당시 나는 목과 어깨, 허리 근육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을 부려 정형외과며 한의원을 순례하던 중이었다. 20대 때는 춤을 좋아해 재즈댄스부터 벨리댄스, 걸스힙합에 태보까지 섭렵했지만 40대에 들어서니 동작 하나에 관절이 잘못되는 건 아닌지 겁부터 났다. 그저 걷기나 수영처럼 유산소 운동이 최선이라며 귀찮은 몸을 일으켜 의무감으로 헬스장과 수영장을 찾았다. 하지만 조금 오래 걸으면 무릎이, 평영이나 접영을 하고 나면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모두 좋은 운동이었지만 ‘무리’ 하지 않는 적정선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흔이 넘으며 ‘평생 취미’에 대한 갈망도 생겼다. 누군가 취미를 물으면 뭔가 근사한 것을 대답하고 싶은데, 음악이나 미술 쪽에는 재주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취미란 모름지기 스트레스를 잊게 하고 일상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악기를 배우거나 그림을 그리려 하면 오히려 온몸이 긴장하고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년에 시작해 노년까지 이어갈 수 있으면서, 잡념을 잊고 몰입할수록  몸과 마음이 재충전되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라던 중이었다.  


우연히 만난 사진 속 장면에 이끌려 필라테스 센터에 들어섰다. 그 후 4년이 지난 오늘까지 필라테스는 나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게 하고, 즐거움과 성취감을 동시에 주는 취미가 되고 있다. 운동을 시작하고 사진 속 인물이 필라테스를 만든 조셉 필라테스(Joseph Pilates)라는 사실을 알았다. 독일인이었던 그는 영국에서 체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포로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으며 이때 동료들과 몸을 회복하고 재활하기 위해 철봉이나 침대 용수철 등을 활용해 운동 기구를 직접 만들었고 운동법을 착안해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딴 운동법을 정교화시켰고 1926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후 최초의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세워 무용수들의 부상 치료와 신체 단련을 도왔다고 한다.


신체의 재활과 회복을 돕는 목적에서 시작한 만큼 필라테스의 장점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내가 다니는 센터에는 키가 크고 싶어 온다는 초등학생과 한눈에도 운동량이 부족해 보이는 중고등학생, 처음엔 여성 회원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나중엔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에 몰입하는 중년 남성과 딸의 손에 이끌려 왔다가 점차 딸이 결석한 날에도 꾸준히 나오는 할머니 회원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필라테스를 꾸준히 한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묻곤 한다. 원래 유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나, 레깅스처럼 꽉 붙는 옷을 입어야 하니 날씬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냐, 일대일 코칭을 받으면 돈이 많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들이다. 그럼 나는 경험에 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렇지 않다는 명쾌한 답을 건넨다. 일단, 필라테스는 누가누가 유연한가를 겨루는 운동이 아니다. 물론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사람이 동작을 하면 더 아름답거나 멋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관절과 근육의 가동성 아래서 어제보다 오늘, 지난달보다 이번 달에 조금 더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면 운동 능력이 늘어난 것으로 충분히 기뻐해도 된다.


나 역시 필라테스를 할 땐 몸에 딱 붙는 상의나 다리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는다. 그런데 이런 의상을 입는 이유는 날씬해 보이거나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의 동작을 할 때 어깨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골반이 틀어지지 않았는지, 무릎은 곧게 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처음엔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수업에 입성한 초보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몸의 생김새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동작이 잘 드러나는 옷을 찾아 입게 된다.


마지막으로 비용에 대한 질문은 ‘하기 나름’이라고 답한다. 처음 필라테스를 시작했을 땐 나 역시 일대일 코칭을 받았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수강료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고 고민을 하다 그룹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일대일 수업은 전문 강사로부터 50분 동안 정교한 자세 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비용의 부담이 있다면 그룹 수업을 들으면 된다. 운동 횟수를 원하는 만큼 늘리고 나에게 맞는 강사를 찾으면 일대일 수업 못지않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일명 질보다 양의 효과라고나 할까.


남녀노소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센터에서 만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이들을 바라보면 필라테스에 필요한 자질은  하나, 바로 꾸준함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엔 온몸이 뻣뻣해 상체를 살짝 굽히는 동작도 힘겨워하던 이가  달이 지나자 몸을 접는 동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거나 체력이 약해 금세 숨을 헐떡이던 회원을 오랜만에 만났더니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 힘들어도 끝까지 동작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 내가 다 흐뭇해진다. 필라테스는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운동이다.


노년의 운동, 노년의 취미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과 나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견주는 , 혼자 힘으로   없는 동작이라면 기꺼이 생활  도구나 기구에 기대어 나의 능력치를 조절하는 과정, 속도나 횟수에 집착하지 않고 나만의 호흡을 찾아 몸의 중심을 잡고 마음을 집중시켜 나가는 시간이 나이 들어가는 우리에겐 필요하다.


오늘도 텔레비전 속에선 노화를 방지하는 신비의 약이라며 건강보조식품을 소개하고 얼굴을 가리면 영락없이 젊은이로 보인다는 근육질의 할아버지, 날씬한 몸매의 할머니가 박수를 받는다. 어쩐 일인지 나는 나이를 잊은  매끈한 얼굴과 몸을 가진 그들처럼 늙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상상하는 , 삼십  후의 모습은 탄력을 잃어 쳐진 피부, 근육이 빠져나간 앙상한 팔과 다리, 두툼하게 쌓인 지방으로 볼록 나온 배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노년의 몸이다.  


흑백 사진 속에서 허공을 향해 팔과 다리를 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미래의 내 모습을 겹쳐본다. 늙었지만 여전히 필라테스를 할 수 있는 할머니로 동네 센터의 터줏대감이 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나이 들어가며 터득한 삶의 지혜 중 하나는 꾸준함도 재능이란 사실이고, 꾸준함을 이어갈 수 있는 대상을 만나는 일은 죽지 않거나 젊어지는 마법의 묘약을 먹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이란 사실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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