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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ul 08. 2022

노인과 낡음을 향한 저주

오래된 몸과 집을 대하는 태도


노인의 몸과 오래된 집은 닮았다. 삐걱거리고 녹슬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세월의 흔적에서 역사적 가치가 느껴진다거나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준다는 긍정의 평가 대신, 낡고 후줄근하다며 기피의 대상이 되곤 한다.     


엄마가 사는 연립주택은 내가 중학생 때 구입했다. 처음 집을 샀을 때 어린 나의 눈에도 헌 집으로 보였으니 지어진 지 삼십 년은 족히 넘었다. 이 집의 가장 취약점은 수도이다. 아직도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고 있다. 수도를 놓으려는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물은 정말 쥐꼬리만큼 ‘졸졸졸’도 아니고 ‘죌죌죌’로 나온다.     


목욕이라도 한번 하려고 하면 적어도 10분 전부터 물을 틀어 큰 플라스틱 통에 온수가 차기를 기다려야 한다. 오래된 욕실이라 욕조도 없고 겨울엔 냉기가 감돌아 큰 볼일을 보러 들어가면 엉덩이가 시릴 정도다. 낡은 욕실과 잘 나오지 않는 물, 허리 수술로도 회복되지 못한 통증과 관절염 때문에 결국 엄마는 달 목욕을 선택했다.     


엄마를 위해 근처 새로 지은 빌라도 돌아보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도 권유해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다채로운 장점들이 낡았다는 하나의 단점보다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엄마의 집은 삼면이 베란다로 둘러싸여 있고 채광과 바람이 잘 들어오며 천장이 높아 개방감을 느낄 수 있는 구조이다. 여행을 가도 호텔 화장실 문을 잘 닫지 못할 만큼 밀폐된 공간에 갑갑함을 느끼는 엄마에겐 이만한 터전이 없다. 결국, 엄마는 손때가 묻은 정겨운 집에서 노년을 보내기로 했다.     


낡은 집, 그중에서도 냉기가 흐르는 욕실을 버리고 엄마가 과감히 이사를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한동안 나는 이제는 다 부질없는 후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만약에’로 시작되는 다양한 가정들을 내세우며 악몽 같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엄마의 코로나19 확진 이후, 나는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 뒤에 숨어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말들을 쏟아낼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봤다. 예전엔 악플 때문에 유명인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심각성을 깊이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엄마가 악플의 주인공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동래구 한 목욕탕을 다녀 간 여성 노인이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는 기사가 나가고, 문자로 목욕탕의 이름과 확진자의 목욕탕 방문 시간이 공시되었다. 엄마의 행적은 그렇게 낱낱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중에서도 매일 목욕탕을 찾았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여기에 다 옮길 순 없지만 대략 내용은 이랬다. 젊은 사람들은 조심하는데 늙은이들이 문제라는 이야기, 이 시국에 목욕탕에 간 사람들은 치료비 지원도 끊어야 한다는 제안, 노인들은 늘 몰려다녀 문제를 만든다는 등의 성토가 이어졌다. 혐오표현이라는 ‘OO충’을 엄마에게 수식어로 붙이는 이도 있었다. 화를 내는 댓글부터 노인과 확진자를 조롱하는 댓글들도 이어졌다.      


엄마에게 퍼붓던 악담들을 읽으며 나의 엄마는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라고, 노인들이 집에만 머무를 수 없는 이유가 각자 다 있다고, 비난하기 전에 그들의 빈곤과 고독을 헤아려본 적이 있냐고 세상을 향해 고함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대나무 숲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사람들의 기억력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어서 얼마 못 가 엄마의 이야기는 맘 카페와 댓글 부대에게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코로나 확진자나 노인을 향한 편견과 혐오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주를 퍼부을 대상이 매번 달라질 뿐이었다.      


평생 글 쓰는 일을 사랑했고, 말로 지식을 전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던 나는 말과 글의 잔혹함을 알아버렸다. 누군가에게는 한번 내뱉으면 그만인 말과 글이었겠지만, 그 고통의 단어들은 흉기로 변해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고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지금도 누군가를 향해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던지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 쉽게 남의 불행을 바라는 당신의 마음이 이 사회에서 더 위험한 바이러스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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