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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May 10. 2022

슬기로운 돌봄 생활 1: 쇼핑 편

돈 쓰는 지혜를 모을 때


남편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하는 이른바 ‘밸런스 게임’ 중이었다. 남편은 우리도 해보자며, 삶의 시기를 선택할 수 있다면 ‘가난한 청춘’과 ‘풍족한 노년’ 중 무엇을 고르겠냐고 물었다. ‘밸런스 게임’은 즉문즉답이 묘미인데,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답답해하던 남편이 자신은 고민할 것도 없이 ‘풍족한 노년’의 삶을 고른다고 답했다.   


과연 남편다운 선택이었다.  먹고, 입고, 갖고 싶은 것들이 가득했지만 마음껏 돈을 쓰지 못할 이유들이 떠올라 스스로의 욕망을 못 본 척해야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과 연애할 때, 자신이 부자라고 느끼는 순간은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의 가격을 확인하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시킬 수 있을 때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하면 부자로 살게 해 주겠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꼬시던 서른한 살의 남편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남편의 바람대로 노년기에 접어들어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특별한 맛으로 소문난 칼국수집이 있다. 다른 칼국수와 다르게 사골을 우려낸 국물을 쓰고, 고명으로 고기와 계란지단, 갖가지 채소들이 듬뿍 올라온다. 칼국수 한 그릇에 5대 영양소가 다 갖춰져 있어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 식당에 갈 때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을 만난다. 이 가게는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메뉴를 선택하고 계산까지 하도록 하는 무인 단말기,  ‘키오스크(kiosk)’가 설치되어 있다. 기계에 익숙하지 못한 손님이나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단말기 앞에서 한참 헤매다 당혹스러워하며 사장님을 부르거나 아예 주문을 포기하고 식당을 나가는 경우를 간혹 목격한다. 남편에게 돈에 대한 충족감을 준다는 식당이 노인에게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게 만드는 야속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쉽게 말할 수 있다. 노인들도 의지만 있다면 키오스크 사용법 정도는 얼마든지 익힐 수 있고, 나아가 배움의 열정으로 디지털 격차도 스스로 해소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남들은 편리하다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모니터 화면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고, 버튼을 누르려해도 손가락 움직임이 무겁고 둔할 수 있으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계산 과정을 인지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러니 그저 ‘늙어서’ 그렇다며, 돈 쓰는 일도 제대로 못한다고 뒤에서 핀잔을 줘서는 안 될 일이다. 노년기에는 돈 버는 일 못지않게, 돈 쓰는 일도 불편하고 어려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곁에는 세 명의 노인이 산다. 아직 60대 끝자락에서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코로나 19를 겪은 후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친정 엄마와 여느 여든 살 어르신들과 비교하면 정정한 편인 시부모님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분 다 교사 출신으로 평생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익히는 데에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였다. 어머니는 불과 이, 삼 년 전까지도 새로운 분야의 교육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해 주위 사람들에게 대단하다는 존경의 박수를 받았다. 아버지는 스포츠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데, 지금도 좋아하는 선수와 팀의 기록을 줄줄이 꾀고 있다. 다방면의 최신 뉴스를 섭렵해 가족 모임이 있으면 “너희들의 견해는 어떠냐?”라고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역할을 도맡는다.      


다른 노년층보다 젊은 생각과 열린 자세로 생활하던 시부모님이 요즘 나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영역이 생겼다. 부모님 댁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거나 인터넷으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는 일을 하나, 둘씩 나에게 맡기고 있다. 결혼 초에는 산처럼 크고 높아 보이던 부모님이 ‘장보기 약자’가 되어 돌봄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말은 못 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고백하자면, 돈 쓰는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부모님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는 세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구나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나에겐 지속 가능한 돌봄의 지혜가 필요했다. 보살핌의 업무가 이제 비로소 시작이라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마라톤에서 오래 달려도 지치지 않을 자세와 주법을 미리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무턱대고 세 분의 돈 관리를 맡거나 쇼핑 영역을 내 일상 속으로 전부 가져오는 일은 나에게도, 부모에게도 건강한 주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 내에서 나름의 쇼핑 지침을 세워 보았다.    


첫째,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일단 메모해두자. 세 분에게 매일 먹는 영양제처럼 소모 시기를 알 수 있는 제품이나 배달을 시켜야 하는 무거운 물품이 생기면 그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지 말고 우선 공책에 써두도록 했다. 자녀들은 외부에서 일정이 있거나 집중해 업무를 보는 중에 부모에게 전화가 오면 마냥 반갑게 통화를 할 수가 없다. 핸드폰 화면에 부모의 번호가 뜨면 불안하거나 피곤한 감정이 먼저 들 것이다. 부모 역시 먼저 전화를 하면 자꾸 눈치를 보게 되고 막상 통화가 되면 무엇을 부탁하려 했는지 가물가물할 때도 있다. 그러니 미리 쇼핑 목록을 써두고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한꺼번에 메모지를 넘겨받으면 좋다. 돌봄을 위한 주문서인 셈인데, 서로 깜박해서 생활이 불편해지거나 마음이 다치는 일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둘째, 부모님이 직접 돈을 지불해야 경우와 선물로 사서 드릴 경우를 나누자. 내게 장보기를 부탁하는 일이 잦아지자 세 분 부모님은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늙으니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식을 귀찮게 한다”는 한탄과 푸념도 매번 덧붙였다. 처음에는 소소한 물건값은 내가 결제하고 돈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엄마와 시부모님 모두 달가워하지 않았다.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미안한데, 경제적 부담까지 지우는 부모가 되기 싫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당하게 쇼핑에 드는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 세 분에게는 오히려 자손심을 세우고 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덜게 하는 길이었다. 난 단지 구매를 대행하는 업무만 하면 될 뿐, 어른들이 누릴 ’ 내 돈 내산’ 즐거움을 뺏을 자격은 없다. 장보기 심부름 후 가끔 잔돈이 남으면 나는 “이건 제 용돈 할게요. 남은 돈으로 며칠 동안 먹고 싶었던 조각 케이크 사 먹어야겠어요!”라고 없는 애교를 짜내기도 한다. 서로 귀찮거나 불편할 수 있는 쇼핑 시간이 즐거운 거래로 변하는 순간이다.    


셋째, ‘전적으로 저에게 맡기십시오’란 말 따위는 하지 말자. 정보 검색이 필요한 온라인 주문을 할 때나 무게가 나가는 제품을 배달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부모님이 타인에게 쇼핑할 권리를 넘기는 것을 반대한다. 노년기의 건강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책에서도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도록 해야 신체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물건이나 쓰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하는 상품이라면  세 분에게 되도록 직접 사러 가기를 권유한다. 장보기나 쇼핑가는 길 자체가 유산소 운동이 되고 근력을 키울 수 있으며 물건값을 치르고 돈 관리를 스스로 하는 일련의 과정이 뇌기능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사야 하는 품목들과 챙겨야 할 영수증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언젠가 나의 가정뿐 아니라 세 분의 부모님 주머니 경제까지 주물러야 하는 ‘큰 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나도, 부모님도 ‘풍족한 노년기’이면 무엇하느냐며 혼자서 무엇이든 사고팔 수 있던 ‘가난한 청년기’를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소한 지혜를 모아 가족들이 덜 힘든 길을 찾아가다 보면, 돈이 주는 행복감마저 나눠 쓸 수 있다고 지금은 우선, 믿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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